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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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에 해당하는 글(10)
2010.03.22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2010.03.22   Camaldoli - 까말돌리 수도원
2010.03.03   유럽 수도원 기행7-아일랜드의 글렌스탈 수도원-최종근 빠꼬미오 신부 글 4
2010.02.18   교황님과 함께 한 재의 수요일 미사 1
2010.01.13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정 70주년(2010.1.12.)
2009.07.28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까말돌리 수도원 4
2008.09.29   주 보나벤뚜라 수사님의 고향 마을 방문 -독일 Nassenbeuren 5
2008.04.15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2008.04.04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1
2008.02.26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한국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과 수녀원들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왜관 수도원에 속한 공동체는 분원들도 표시하였고, 다른 수도 공동체들은 본원만 표시를 하였습니다. 지도 아래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면 더 큰 화면에서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색깔별로 된 표식을 클릭하면 각 공동체의 홈페이지 주소가 적힌 풍선이 나타납니다. 왼쪽 상단에 있는 + - 를 눌러 지도를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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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aldoli - 까말돌리 수도원

블로그에 까말돌리 수도원에 대해서 두 번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간혹 방문하려는 분들의 연락이 있네요. 위치와 가는 방법을 올려놔 봅니다. 이곳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있는데,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한 은수처(Sacro Eremo)가 있고, 그 아래 동네에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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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하면 더 큰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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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 : 해발 800 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단체 피정을 위한 시설이 있고, 강좌나 학술발표회 등이 자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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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수처 : 이곳은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수도자들이 각자의 은수처에서 생활한다. 젊은이들을 위한 집과 피정의 집이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 수도원 기행7-아일랜드의 글렌스탈 수도원-최종근 빠꼬미오 신부 글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09년 겨울호에 실린 최종근 빠꼬미오 신부의 글입니다. 



길을 나선 고양이 수사



나는 정주를 아주 잘 한다. 고양이가 자기 사는 장소를 떠나지 않듯, 나도 한번 자리 잡은 곳은 잘 떠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냥 한 곳에 짐을 풀고는 낮잠을 자든지 쥐를 잡든지, 아무튼 혼자서도 내 할 일 하며 잘 노는 편이다. 내가 정주 서원을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이런 나의 고양이 같은 습성에, 꼼짝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즘이 더해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로마의 안셀모 수도원은 좀 이상한 수도원이다. 여름방학만 되면 칠월부터 삼 개월 동안 방 빼고 떠나 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방학이 되었으니 자기 수도원에 돌아가라는 말이지만, 그건 유럽 수도원들에서 온 수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처럼 제3세계에서 온 수사들은 이때부터 방랑 수도자의 삶, 소위 '기로바꾸스' 생활이 시작된다. 


물론 이 시간은 어학연수를 하거나 유럽의 명소인 큰 수도원들을 방문해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건 맞지만, 집을 떠나 들개인양 돌아다녀야 하는 고양이에게는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너무 그러면 사람이 소심하고 마음이 쪼짠하단 소리를 듣기 때문에, 내 안의 고양이 한테는 미안하지만 때론 그냥 냅다 신천지에 몸을 던져버리곤 한다. 지난 여름에도 그랬다. 수사님들과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 영어 회화나 실컷 해봐야지 하는 생각에 아일랜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찾은 곳이 아일랜드 전체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글렌스탈Glenstal 수도원이었다.



숲속의 수도원


일단 가기로 결심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려나갔다. 구글 지도에서 수도원 위치를 확인한 다음, 그곳에서 한달간 좀 지낼수 있는지 문의메일을 보냈더니 두말 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라고 즉시 답장이 왔다. 곧 바로 인터넷검색으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로마에서 더블린까지 22유로에 가는 저가 항공권을 구입했다. 우리 돈으로 약 4만원밖에 하지 않으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더블린 공항에 내려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두서너 시간을 달려 리머릭Limerick이라는 도시까지 가야했다. 생전 처음 가는곳은 교통요금이나 운행방식이 생소할때가 많아서 아차 실수하면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는 안셀모수도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나이지리아 친구 다미안 수사가 동행한 덕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 다미안 수사와 >>


다미안은 매년 방학 때마다 자기 모원인 글렌스탈에 가서 지낸다고 했다. 리머릭시 보다 한 정거장 앞인 리머릭 졍션Limerick Junction에 내리자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에서 한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더니 우리쪽을 향해 "헤이, 다미안! 다미안!"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 위에 작업복 같은 양복 재킷을 입고, 영화배우 숀코네리처럼 희고 멋진 구레나룻 수염을 종종 만지작거리면서, 시종일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와 농담을 던지셨던 그분은 킬론Cillon 수사였다. 


역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수도원까지 우리를 태우고 가는 동안, 아일랜드의 칙칙한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수도원에서 부원장급으로 대우받는 자기 애완견 이야기까지, 정말 지루할 순간도 없이 함께 깔깔거리며 즐거운 드라이브를 했다. 수도원에 도착할 즈음, 근처 애완동물 가게에 잠깐 들르더니 외상으로 샀다며 개밥 한자루를 차에 싣고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진입로 좌우로 비에 젖은 초원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아름드리 거목들이 솟아 있었다. 

 

한참을 들어가도 수도원이 안 보이길래, 수도원 땅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지 물어 보았더니, 5백 에이커라고 한다. 나중에 평수로 계산해 보았더니 61만 2천여 평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숲속 수도원에서 여름동안 은거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가슴 뿌듯해서, 그때 마침 영국 암플포쓰Ampleforth 수도원에서 지내 고 있던 박블라시오 신부에게 전화해서 자랑했더니, 다음날 바로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암플포쓰는 2천 에이커라고 했다.



숲속 수도원의 비밀


글렌스탈 수도원은 벨기에의 마레쭈Maredsous 수도원1927년 아일랜드에 설립한 수도원 이다. 마레쭈 수도원은 2000년도에 요한 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콜룸바 마르미옹 Columba Marmion이 아빠스로 있던 곳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처음에는 아일랜드 교구 신부였다몇년 동안 교구 내 여러 중책을 맡기도 하고 영적지도자로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되었다


 

1923년 마르미옹이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마레쭈수도원에서 그를 기념하여 4년뒤 아일랜드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훌륭한 영성서적을 많이 써서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그 덕분에 원래 맥주와 치즈로 유명했던 마레쭈 수도원이 갑자기 영성의 중심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한편 어떤 수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글렌스탈 수도원이 세워질 때 만해도마레쭈 수도원이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 마르미옹 아빠스가 쓴 책들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많아진 돈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까 고민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재테크 전문가가 마레쭈의 당가 수사에게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게 최고!”라고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마레쭈 수도원은 그 조언을 당장에 실행에 옮겼는데, 그리고 얼마 안 있 어 세계 경제 대공황이 불어 닥쳤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마레쭈 수도원은 청빈의 영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결국 모원의 지원이 뚝 끊긴 글렌스탈 수도원은 걸음마 때부터 자력갱생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고 한다.


 


샤크(상어)가 누구지? 


글렌스탈 수도원이 차지하고 있는 그 넓은 땅은 본래 벨기에 수사들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영국 귀족 가문의 소유였다. 런던의 윈저성을 본 뜬 대저택을 짓고 아일랜드인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유복한 삶을 살고 있던 그 영국인 가족은 어느날 그만 슬픈 변을 당하고 말았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800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고 독립하려고 몸부림치던 1920년대 무렵그 영국 귀족의 딸이 아일랜드 독립군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숨지는 일이발생했다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글렌스탈의 모든 건물과 땅을 버려둔 채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나중에 이곳을 교구에서 매입하였고 이 넓은 땅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우는 조건으로 마레쭈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 학교 >>


현재 성당과 수도자 숙소, 피정집 및 도서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남자 기숙학교로 쓰이고 있다. 선생 수사의 안내로 학교 안을 둘러보았다. 초중고 학생들이 다함께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어린이집 처럼 앙증맞게 꾸며놓은 교실에서부터 대학 강의실처럼 빔프로젝트까지 설치해 놓은 방까지 시설들이 참 다양했다. 방학이라 학교가 텅 비어 있은 덕분에 개인 침방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두 평 남짓한 조그만 침실에는 공사 중이었는지 신발자국이 군데 군데 묻은 헌 신문지들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보았는데 벽지를 바르지 않아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회색빛 벽면에는 빨간 유성 매직으로 그린 낙서가 보였다. 방주인의 자화상인 듯한 얼굴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었다


계단을 돌아 내려오니 식당이 몇 개 있는데, 학년별로 따로따로 밥을 먹는다고말했다복도를 지나 입구쪽으로 가자 게시판이 보였다. 학교 생활하며 찍은 사진들이 그 위에 잔뜩 붙어 있었다그 중에 몇장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하늘색 양장을 차려입은 부인이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진이 있기에, 안내를 해주던 수사한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샤크Shark”라고 했다.  ‘샤크? 상어?’ 하며 어리둥절해하니까, 아일랜드 대통령을 자기들은 ‘상어’, 즉 ‘샤크’라고 부른다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 대부분의 수사들이 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어서인지 수도생활 또한 학교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받았다작년말 8년 임기의 새 아빠스로 선출된 패트릭 수사Br. Patrick 역시 한때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고 한다.



아빠스는 아무나 하나?


패트릭 아빠스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내가 그동안 유럽에서 만난 아빠스들이 대개 다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신 분들이었지만, 패트릭 아빠스는 저러시다 권위가 손상되면 어쩌나 염려될 정도로 타고난 익살꾼이었다. 그런데 이분 은 수도생활 45년 동안 평수사로 잘 살아오시다가 그만 아빠스에 당선되었다. 현 교회법상 신부만 아빠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아빠스로 뽑힌 데는, 물론 패트릭 아빠스의 덕망도 있었겠지만, 내가 들은 첩보에 의하면 공동체 전체의 강력한 염원이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유럽식 낫질을 보여 주는 패트릭 아빠스 >>


바티칸의 허락을 받고 아빠스로 먼저 선출된 다음에 준비되는 대로 차례차례 부제품, 사제품을 받았다. 예전부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였는지 아빠스가 되신 뒤에도 여전히 미사때 성가대 사이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내게는 약간 생소했지만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빠스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공동체 전체회의에 손님인 나도 참석해도 괜찮다고아니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여 몇번 가서 앉아 있어 봤는데, 듣고 있자니 공동체의 현안들을기탄없이 서로 나누고 있는게 아닌가나 외에도 견학 온 성소자도 한 명 같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가니까 앞으로 입회해서 살 수 있겠는지 잘 판단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곳 수사들에게서 받은 공통적인 인상은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 손님 안내를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신부였다. 다른 수도원과 달리 이 수도원에서만 본 관습이 하나 있는데매일 저녁식사 때 피정온 손님들과 함께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다. 수사들 이 모두 식당에 모여 있으면, 크리스토퍼 신부님이 남녀가 섞여 있는 손님 일 고 여덟분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와서 손님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서 같이 식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사실 수도원 식당에서 여자는 말 할것도 없고 일반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인데, 환대를 표현하는 방식이 이렇게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뭐든지 절대적으로 옳은 관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다른날 처럼 비오는 날 오후주방에서 다미안과 잼 만들려고 따놓은 구즈베리 열매를 다듬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신부가 다가 와서는 왜관에 돌아가면 시몬 아빠스께 안부 전해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시냐고 여쭈었더니로마에서 4년마다 열리는 아빠스 총회때 만났다고 하셨다. 알고 봤더니 이분이 바로 패트릭 아빠스 전에 16년 동안 아빠스로 계셨던 분 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서 그런지 얼굴에서 행복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섬 구경을 나선 고양이 수사


한편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글렌스탈 수도원이 워낙 시골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차가 없으면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데다가, 한 달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죽죽 내리니 어디 나다니기도 귀찮았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극히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정원에서 일하시는 브라이언 신부가 나를 위해 하루소풍을계획했다.

                                                 << 브라이언 신부 >>


수련장 신부한테 부탁해서 운전자로 수련자 한 명까지 구해 놓고는 좋은데 같이 구경가자고 했다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는데 가보면 놀랄거라고 말하긴 했어도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아침을 일찍 먹고 승용차에 올라타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국도를 고속도로 처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아일랜드 서해안의 모어 절벽Cliffs of Moher이었다. 2백 미터가 넘는 높이에 장장 8킬로미터 뻗어있는 해안 절벽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이런 기가 막힌 관광지에도 다 와보고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며 사진도 찍으면서 이 놀라운 장관을 마음속에 깊이 깊이 담았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안개와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좀전까지 그토록 투명하게 빛나던 해안선이 안개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빠코미오! 우린 아주 운이 좋았지, 그치?” 브라이언 신부님의 말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며 멀리 도로 앞을 보니, 아마도 더블린에서 오는 차들인지 모어 절벽을 보러 오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복도 많고 운이 좋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일 년 열두 달 이렇게 매일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토사가 바다로 많이 씻겨 나간다그래서 지형이 꼭 달 표면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농사와는 영 거리가 먼 환경처럼 보였다. 그나마 아무데서나 잘 크는 감자 덕분에 아일랜드에 사람이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1845 년부터 1851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대기근 동안 백만 명 이상 굶어죽었다는 역사가 왜 가능했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가혹한 영국 식민지배를 받으며 굶고 지친 아일랜드인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아메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던 곳, 바로 그 항구가 모어 절벽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출발한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브라이언 신부와 점심 먹으러 들어간 어느 해안가 식당에서도 그런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1912415일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대한 당시의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식당 벽 액자에 넣어 걸려 있었다. 달을 탐사하는 듯 해안 구석구석을 돌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사진 찰칵 찰칵 찍고, 다시 또 출발하고,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무렵 수도원에 돌아왔다. 이 날 말고도 브라이언 신부는 내가 아일랜드 정통 아침식사가 뭔지 맛봐야한다며 일부러 리머릭 시내 관광 일정까지 마련해 주었다. 글렌스탈을 떠나오는 날, 빠코미오가 봐야할 게 아직 많은데 이렇게 일찍 가서 아쉽다며 성탄 때 꼭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사랑이란 다름을 인정하는 일


글렌스탈 수도원을 떠나온 지도 벌써 반 년이 다 되어 간다. 성탄 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 아일랜드에서 못 다한 구경 때문이 아니라 브라이언 신부와 패트릭 아빠스 그리고 여러 수사들이 보고 싶어서이다. 세상 모든 수도원을 다 다녀 보고 체험해 볼 수는 없지만, 가는 곳마다 참 보고 배우는 게 많다


하느님 찾는 목표는 같아도 역사와 문화가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다르다.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고 이해하면 할수록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대신 두루 뭉술한 식별이긴 해도 사랑하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에 정주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 만족에 안주 하고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여행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잠시 고양이의 삶을 버리고 들개처럼 돌아다닌 지난 여름이 은총의 시간이라 느껴진다. 책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랑을 배우라는 하느님의 뜻이리라



 



교황님과 함께 한 재의 수요일 미사
예년과 같이 재의 수요일인 오늘(2010.2.17) 교황님께서는 오후 4시경에 아벤띠노 언덕에 있는 성 안셀모 수도원(Badia Primaziale di Sant'Anselmo)을 방문하시고, 그곳에서 산타 사비나 성당(Basilica Santa Sabina)까지 참회 행렬을 하셨습니다.

산타 사비나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고, 영성체도 해 주셨습니다. 미사에는 많은 추기경님들과 주교님들, 베네딕도회원들과 도미니코 회원들을 위시하여 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올해도 안셀모 수도원의 성가대원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불렀습니다. 로마 생활 첫해에는 교황님으로 부터 머리에 재를 받았고, 작년에는 미사 중에 재를 신자들 머리 위에 얹어주고 영성체를 분배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올해는 성가대 일원으로 봉사했습니다.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많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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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정 70주년(2010.1.12.)
작년 2009년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1909-2009)이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처음 한국에 도착해서 설립한 서울 수도원은 백동, 현 혜화동 서울가톨릭신학교 자리였다. 작년 왜관수도원에서는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백동수도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수도원 계간지 '분도' 겨울호(2009) 뒷표지에 표지석 사진이 실려 있다. 

백동수도원 표지석


"백동 수도원 터 - 1909년 성 베네딕도의 제자들이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초청으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해 가을 이곳 동소문 안 백동에 한국가톨릭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숭공 기술학교와 숭신 사범학교를 열어 복음전파와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서 살아온 그분들의 헌신을 기리며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 진출 백주년을 기념하여 여기에 빗돌을 세운다. - 2009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축일에 성 베네딕회 왜관수도원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100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수도 공동체에게 밀려왔던 일련의 수 많은 시련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왜관수도원 본원에서는 2009년 마감을 며칠 앞두고(12.28)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북한 지역에서 순교하신 38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예비심사법정을 개정하였다. 이분들이 복자와 성인으로 선포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첫 시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신문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겠다.


오늘 한국주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오늘이 북한에 있는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 설립 7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1940년 1월 12일 원산 대목구에서 분할). 침묵의 교회라 불리는 곳이지만 앞으로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애쓰고 계신다. 

평화신문(2009.08.23.)에 덕원 면속구(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함흥 교구) 설정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연속성 안에서 살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현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까말돌리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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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말돌리 은수처 들어가는 출입문. 왼쪽에 수도원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한 겨울에 눈이 많이 오니까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여우나 늑대도 있는 모양이다. 여우에게 먹이를 주는 사진이 인상적이다...>>


  2007년 6월, 로마에서의 첫 두 학기를 연거푸 보내고 처음으로 방학을 맞이하였다. 독일로 가서 석 달 동안 지내며 독일어를 익힐까 생각하다가, 이탈리아어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여 방학을 지낼 이탈리아 수도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도원의 유학 형제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했던 이탈리아 북부의 쁘랄리아 수도원Abbazia di Praglia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이어 이탈리아 중부의 높은 산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에서 8,9월을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1일, 한 달 동안 정들었던 쁘랄리아 수도원을 떠나 깊은 산 속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을 찾아 떠났다. 먼저 기차를 타고 아레쪼Arezzo라는 곳으로 갔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고, 도레미파로 시작하는 음계명과 악보 표기법을 최초로 고안한 수도자 귀도Guido d'Arezzo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매년 ‘세계 다성음악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레쪼 역은 생각보다 컸다. 그곳에서 다시 서너 칸짜리 미니 기차로 바꿔 타고 50분 정도 걸려 빕비에나Bibbiena라는 작은 시골 역에 도착했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진 곳이었다. 역 안에서 버스표를 사면서 까말돌리 수도원에 간다고 하니까 버스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이곳은 프란치스꼬 성인이 오상을 받은 라 베르나La Verna와도 가까운 곳이라서 그곳으로 가는 순례자들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몇몇 작은 동네들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산 속 꼬부랑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산길을 한 구비씩 돌 때마다 산 위쪽으로 쑥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역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주위는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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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은수처가 있는 봉쇄구역의 출입문>>

역에서 떠난 지 30분 정도 되자 버스는 까말돌리 수도원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다. 해발 1100미터에 다른 까말돌리 공동체가 있는데, 로무알도 성인이 처음으로 은수처를 만들고 사셨던 사끄로 에레모Sacro Eremo라 불리는 곳이다. 여름철에는 방문객들이 많기 때문에 사끄로 에레모까지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내가 처음 까말돌리 수도원에 메일을 보냈을 때 손님 담당이었던 에밀리오 수사는, 8월에는 아랫쪽 공동체에서 지내고, 9월에는 위쪽 은수처에서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해볼 수 없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즉시 답장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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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기도나 공동 식사를 마치면 모두 자신의 은수처로 돌아간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라벤나Ravenna 출신의 성 로무알도S.Romualdo(951-953년경 출생-1027년경 귀천)에 의해서 설립된 수도원이다. 이곳 수도자들과 이야기 하던 중, 우리 수도원이 2009년에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하니까, 자신들은 곧 1000주년을 맞이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성인에 대해서는 베드로 다미아노가 적은 '성 로무알도의 생애'(1042년 저술)를 통해 알 수 있다. 로무알도 성인은 여러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는데, 아레쪼 인근의 까말돌리 수도원은 성인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설립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까말돌리 수도원의 특징은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면서도 은수적 고독과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도 사크로 에레모에는 로무알도 성인의 은수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른 은수처들도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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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로무알도의 은수처 위에 있는 수도원 도서관>>

수도자들의 개인 은수처cella들은 모두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도자들이 손노동을 할 수 있는 정원 혹은 텃밭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한번 꺾이면서 거실이 나타난다. 복도에는 바깥쪽으로 화장실과 장작을 쌓아두는 창고가 연결되어 있다. 외부 벽과 거실 사이에 있는 복도와 창고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배치했다고 한다. 거실에는 벽난로와 쇠로 만든 난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다 보니 한 여름에도 장작불을 피우고 지내야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행여 불이라도 꺼뜨리는 날에는 금방 추위가 엄습했다. 거실에는 기도실, 공부방, 침실이 연결되어 있다.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 세상의 소리나 소식은 봉쇄구역 앞에서 멈출 듯한 곳, 바로 그곳이 까말돌리 수도자들의 은수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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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는 기도와 미사도 각자의 은수처에서 혼자서 드렸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문을 통해서 식사를 넣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전례와 미사, 식사를 공동으로 한다. 공의회 이후에 모든 수도회들이 쇄신과 적응의 시기를 보낸 것처럼 까말돌리 수도회도 변화의 시간을 겪었다. 위에서 말한 생활양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도복을 간소화하고 기도 때에만 망토와 같은 수도복을 착용하였다. 기도도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유 선법이 아닌, 이탈리아어에 적합한 멜로디로 노래했다. 이러한 토착화를 위해 몇 십 년 동안 준비했다고 기도서 서문에 적혀 있었다. 이 대목에서 좀 생각이 많아졌다. 라틴어와 그렇게 가까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랫동안 토착화 작업을 하는데, 한국에서의 토착화 작업이란…….

까말돌리 수도회도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는 이상 손님 환대의 정신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개인 피정과 단체 피정, 젊은이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있어서 여름철 동안 늘 사람들로 붐비었다. 가톨릭 학생회 소속의 대학생들은 50년이 넘게 매 여름마다 두 주씩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이 끝나면 휴가 온 가족들을 위한 두 차례의 피정이 열리는데 이것도 벌써 몇 십 년이 되었단다. 이 행사 후에는 까말돌리회 회원들이 빠도바의 산타 쥬스티나 수도원의 전례사목연구소와 함께 학술 모임을 여는데 공의회 이후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전례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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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까말돌리의 밤나무. 이 밤나무 안에 탁자를 두고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까말돌리 수도자의 사진이 아주 유명하다.>>

그 밖에도 많은 모임들이 정기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친 이들이 평안하게 밤나무 길을 산책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산 속에 깊숙이 있는 수도원은 신자들에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영적으로도 충전할 수 있는 공간, 언제든 찾아가면 반가이 맞아 주는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도자 공간은 손님 공간과 잘 구분이 되어 있어서, 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까말돌리 수도원들 중에는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몬테꼬로나Montecorona 계열의 수도원들도 있다. 산의 맑은 정기를 머금고 있는 수도자들과 생활하다보면 많은 것들이 단순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에게서 느꼈던 인간미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떠오른다. 또 다시 여름. 높은 산의 긴 겨울과 짧은 봄이 지나고 또 다시 그 향기에 이끌린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오리라. 지난 천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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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이 넘으셨지만, 주방 설걷이를 할 때 항상 형제들과 함께 하시는 안드레아 수사님>>


참고할 만한 누리집
http://www.camaldoli.it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이탈리아)
http://www.camaldolese.org 몬테꼬로나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미국)
http://osb.or.kr 수도승 영성 자료실- '성 로무알도와 까말돌리회 영성'




주 보나벤뚜라 수사님의 고향 마을 방문 -독일 Nassenbeuren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어 오셔서, 40년 넘게 생활하신 보나벤뚜라 수사님.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늘 바쁘게 지내시는 수사님.

본국 휴가중이신 수사님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만났다. 병원에 다니시는 관계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파킨슨병 전문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시기 전에 자신의 고향 마을을 꼭 보여줘야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 게롤드 수사님이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수사님의 고향 마을로 향했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Nassenbeu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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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근처에 도착하니, 높이 솟은 '마이바움' (Maibaum : 5월의 나무)이 우리를 반긴다. 10월에 눕혀 놓았다가 5월 1일에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것을 세운다고 한다. 나무에 가지처럼 붙어 있는 것은 그 마을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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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도착한 집은 수사님의 쌍동이 여동생 집이었다. 아마 휴가 기간에는 이곳을 아지트로 삼고, 그 다음에 수도원과 은인들의 집들을 오가시는 모양이다. 마침 오후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주위에 사는 수사님의 친척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식탁보도 새로 깔고, 커피와 빵도 나왔다. 오후 커피 시간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거의 하루의 필수적인 일과와도 같았다.

건포도가 들어 있는 이 빵은 이곳에서는 토요일과 주일에만 먹는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도 주일 아침 식사 때만 맛볼 수 있었다. 가톨릭 신앙심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남쪽 독일 지방에서는 평일과 주일, 축일 등을 구분을 하고, 축제의 등급에 따라 먹는 것, 마시는 것, 사용하는 물건 등을 구분해서 한다고 한다. 집안에 거실을 아주 멋있게 꾸며 놓고, 그 방은 주일이나 축일 때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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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구경을 하는데, 수사님과 쌍동이 여동생의 어릴 적 사진이 있었다. 6,70여년 전의 사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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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 집에 살고 있는 수사님의 조카와 딸. 다음날 휴가를 떠난다고 들떠 있었다. 대략 이 동네에 수사님의 친척집이 5,6집은 되는 것 같았다. 먼 친척까지 따지면 더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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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는 이곳에서 보기 힘든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왜관 수도원 구성당 옆에 있는 대나무를 옮겨다 심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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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을 한 다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경당으로 향했다. 300년 된 보리수 나무 가로수 길이 아주 멋있었다. 이 길 끝에 경당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하게 보이는 경당이었지만, 안에 들어서니 아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꽤 유명한 순례 성당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나라 성탄 성가 중에 '귀여운 아기들 모두 오너라...' 이렇게 시작되는 성가를, 이 성당 주임 신부님이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성당 한쪽에는 이러한 내용을 적은 안내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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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은 이 보리수 나무 길과 '설지전' 경당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 사이에 있는 의자들은, 수사님의 아버님이 마을 동장을 하던 시절에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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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성당의 정원에는 거의 예외없이 무덤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모든 모덤들이 꽃들과 화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 무덤은 수사님 집안의 가족묘라고 한다. 부모님이 여기 안장되어 계시고, 형제들이 앞으로 이곳에 묻힐 것이라고 했다.

성당은 주로 동네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다니기도 하고, 자신의 친척이 묻힌 곳이고, 앞으로 자신이 묻힐 곳이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거의 매일 이 무덤들을 돌아보고, 장식을 하고, 무덤 앞에서 기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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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수사님 앞에 놓인 그 세례대에서 수사님도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성당의 어떤 좌석을 가리키며 저 자리는 아버지가 항상 앉으시던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물건 하나 하나에도 수 없이 많은 사연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이 빨리 빨리 바뀌고 새로운 것들이 옛것들을 밀어내는 것이 빈번한 우리나라에서는 잘 접하기 힘든 느낌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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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신부님과 오 루까 수사, 강 안셀모 수사님이 오틸리엔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그래서 함께 수사님이 입원하신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수사님의 동기 신부님과 수사님, 루드비히 수사님도 함께 했다.

아마 지금쯤은 퇴원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본국 휴가를 몇일 더 보내시고, 10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가시리라 생각된다. 수사님이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자랑하시듯이, 한국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시면 그리운 고향의 음식과,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또 기쁘게 사시리라 생각한다.

수사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내부 사진들을 몇장 올려 본다. 이 곳 수도원 방문 소감은 수도원 발행 잡지 [분도 芬道] 여름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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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중심인 제대. 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형제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아담하게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젊은 형제들이 많아서인지 성가 소리는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수도자들의 기도석인 '코러스'(가대)는 제대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미사 이외의 모든 기도는 코러스에서 거행하였다.

외국에 와서는 기도석에 무릎을 꿇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체형이 서양 사람들 그것과 달라서인지, 정강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높이와 딱딱하기가 왜관의 장궤틀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왜관 수도원에 있던 내 체형에 딱 맞는 기도석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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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밤에 찍은 사진이다.

제대 앞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모습을 묘사한 전신상을 갖다 놓았다. 뻬루쟈(Perugia)에서 이태리말을 배울 때 보니까, 성 금요일 밤에 신자들이 이 상을 모시고, 골목 구석 구석을 돌며 수난 예식을 하였다. 신자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메고 가고, 중간 중간에 멈춰서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였다.

이 수도원에서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 날 밤에 비가 무지 무지하게 내렸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연세 드신 수도자들을 제외한 모든 수도자들이, 저녁 식사 후에 인근 교구에서 있었던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석하였다.

끝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에 도착하니까, 연세 드신 수사님 몇 분이 개별적으로 기도를 하고 계시고, 다른 분들은 오지 않았다. 물어보니, 다른 곳에서 하는 십자가의 길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이 분들과 함께 TV방에서, 로마의 꼴로세오(꼴로세움)에서 교황님과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보았다. 로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십자가 옆에 휏불을 들고 있는 남녀 한 쌍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꼬박 비를 맞고 있었다.

교황님과 성가대는 텐트 안에서 기도를 바쳤는데, 텐트에 고인 물이 연신 떨어지는 것이 텔레비젼에 비쳤다. 신자들은 추운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꼴로세오 주위에서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올해 꼴로세오에서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중국 교회가 많이 부각되었다...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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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진 수도원 복도.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벽화에 옮겨 놓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그림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왜관에 있을 때, 수도원에서 보았던 책 속의 많은 그림들이, 이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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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성인이 수비아꼬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계실 때, 로마누스가 절벽 위에서 음식을 내려 주는 장면.

이곳에 그려진 모든 벽화에는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고 있다. 올리베따노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기 때문인 것 같다(white mo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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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건물은 성당과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건물이다. 오른쪽 건물은 일반 신자들이 방문하여 머물 수 있는 건물이고, 기념품 가게도 있다. 엽서나 사진, 책들, 수도원에서 만든 포도주, 전통의 비법으로 제조된 화장품이나 비누 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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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식당.
넓고, 많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떤 수도원에 가 보면, 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일부러 밥 맛이(빵 맛인가?!!) 떨어지는 그림을 식당 벽과 천장에 그려 놓은 경우가 있다!!~~ 여기는 그렇지는 않았다.  

식사 때는 침묵을 지키고 독서를 들었다. 성 금요일에는 아빠스님께서 직접 식사 중에 독서를 읽으셨다.

음식이 나올 때 마다 여러 형제들이 봉사를 하여 음식을 분배하였다. 단 주의 사항!!  한번 지나 간 음식 접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서는 음식 접시를 두 번 돌린다. 부족하면 더 덜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남은 음식은 바로 주방으로 직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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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 놓을 수 없는 곳.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원의 포도주 저장 창고.

5,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내 키보다 더 큰 포도주 통들이 지하실 양 옆으로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이 통들이 오래 되어서 여기에 포도주를 저장하지는 않고, 다른 곳에서 제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 반경 몇 십 킬로 이내에 유명한 포도주 산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가장 유명한 토스카나의 끼안티 포도주, 몬떼풀챠노, 몬딸치노 ...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한국에는 두 곳에 남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다. 한 곳은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http://osb.or.kr )이고, 다른 한 곳은 경남 고성군에 있는 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http://osb.brothers.or.kr) 이다.  

    왜관 수도원독일 뮌헨 근처의 샹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에 의하여 한국에 세워졌고, 고성 수도원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또(Monte Oliveto Maggiore) 수도원을 총원으로 하고 있다.
 
    베네딕도회는 자치적인 성격이 강한 수도회라서, 지역이나 설립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연합회로 나뉘어진다. 왜관 수도원과 고성 수도원은 같은 베네딕도회이지만, 다른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인 셈이다.


이태리에 머무는 동안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성주간 동안에 방문하게 되었다. 성주간에 로마에 머물러야 하나, 다른 곳을 방문할까 고민하다가 성주간 1주일 전에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의 아빠스님께 메일을 드렸다.
 
"가도 될까요?"  다음날 아침에 바로 팩스로 답이 날아왔다. "당연히 와도 되지!!" 그리고 오는 방법까지 팩스 용지에 가득 적어 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18년 동안 수도원장직을 수행하고 계신 아빠스님은, 내가 다니고 있는 라떼란 대학교에서 사목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무척 활기 있고 친근감 있게 맞아주셨다.

의정부 교구 신부님 한 분과 함께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아쉬아노(Asciano)역. 도착해서 전화를 하면 수사님이 마중을 나오신다고 했다. 중간에 Chiusi 에서 시에나 행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기차편이 많지 않은 노선이라서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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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로 계속 가면, 가타리나 성녀로 유명한 '시에나'가 나온다. 그리 멀지 않은 듯.

기차 철길 옆으로는 넓은 밭들과 벌판이 펼쳐져 있고, 먼 산의 구릉에는 새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냥 느낄 수 있는 풍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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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iano 라는 동네는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기차 역이 두 개나 있었다. 역 이름이 Asciano Monte Oliveto Maggiore 였다. 수도원 이름을 딴 역이었다.

이런 것 까지 미처 알지 못한 우리는 다른 역에서 내려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근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우리를 태우러 테오도로 수사가 나왔다. 다른 역에 갔다가, 필시 잘못 내렸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정말 이 작은 촌 동네에 역이 두 개나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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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봄이라 풀이 자라기 시작한 구릉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달렸다. '야!!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경치에 취해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은 돌아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테오도로 수사가 중간 중간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차를 세워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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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날은 이렇게 날씨가 좋았는데, 그 다음 부터 성주간 내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계속 내리고, 먼 산 높은 곳에는 눈도 보이고... 무척 추운 성주간을 보냈다. 해발 500 미터에 있는 수도원의 방은 정말 추웠다!!  간간이 스팀이 돌긴 했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 날에는 아빠스님이 며칠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우리를 위해, 옆 동네에 미사를 하러 가시면서 우리를 태우고 가셨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중세의 성곽 도시를 둘러 보라고 하셨다. 그 때 3,40분 동안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미사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날씨가 악화되더니만, 우박까지 퍼붓기 시작하였다.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을 다녀 오는데 이런 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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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usure 라는 중세 성곽 도시에서 내려다 본 풍경. 멀리 구릉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곳은 인근에 시에나피렌체라는 강력한 도시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배하에 늘 있었다. 중세로 부터, 이들 도시간의 경계 지점에 있는 성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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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usure는 다른 곳 보다 높은 곳이라서 주변 경치가 좋았고, 자그마한 도시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 수도원도 보였다.

수도원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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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과 조금 떨어져 있지만, 수도원 들어가는 길목에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고, 주차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지만, 예전에는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마 유사시에는 다리를 들어 올리고 접근을 차단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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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안 쪽에서 바깥으로 바라 본 장면>> 

성문을 통과하여, 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 수도원 입구에 일반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안내문이 영어, 독일어 등으로도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머무는 것 같았다. 그 집에 딸린 수도원 기념품점도 있었다.

오랫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인 만큼(1313 년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수도생활 시작) 수도원 내부에 볼거리도 많았고, 수도자들의 기도도 아름다웠다.  늘 수도원 앞에는 내부 관람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 기념품점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기 위해 오는지는, 개봉 박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작성할 예정임.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왜관 수도원은 2009년에 백주년을 맞이한다(1909-2009).
 
1909년 독일 뮌헨 인근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Sankt Ottilien)의 수도자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시작된 것이 마치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한국 전쟁의 와중에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하느님의 섭리는 수도자 공동체와 늘 함께 하셨다.

북한 땅에서 피를 흘리신 수도원 장상과 수도자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은인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했던 많은 수도자들과 은인들...

달력의 첫 장에 적힌 것 처럼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며" 라는 문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1.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를 파견한 분

2.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 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3.        백화동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설립자

4.        김영근 베다 신부 - 피난공동체 장상

5.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설립자

6.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신부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7.        백오리 비뚜스 수사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수사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8.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 덕원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9.        스위스 캄 올리베따노 수녀회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 연길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10.     오병주 요셉 선생 – 덕원,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 협력자

11.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 은인(피난공동체를 도우신 분)

12.     임정업 마리아 여사 – 은인(왜관 수도원 성당 봉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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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1870
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95년 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 달 뒤에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897년 첫 서원을 했다. 1902년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국에 진출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순방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 받았고, 어려운 수도원 사정에도 불구하고, 1908년 선교사를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방문 중에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해 독일로 가져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금강산이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한국문화를 유럽에 알렸다. 1931년 총아빠스직을 사임하고 동아프리카 페라미호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564 3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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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87
년 독일 풀다 교구 오베루프 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08년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 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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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동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1889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오토보이렌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교육, 출판, 자선사업을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1950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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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베다 신부

191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고 1943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9년 덕원 수도수도 폐쇄될 때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로부터 장상권을 위임 받은 노 안셀모 신부가 당시 차부제였던 김 베다 신부를 한국인 수사들에 대한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교회와 연합회에 덕원 수도원 상황을 알렸고,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새로 꾸려진 피난 공동체의 생계와 영성을 책임지며 1952년 장상으로 임명된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실질적인 장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사목과 피정집 책임, 분원장, 수녀원 지도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김 베다 신부는 강론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02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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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1905
년 스위스 바셀 교구 로어에서 태어났다. 1927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군데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수를 맡기도 하였다. 1947년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불안한 한국 내 정치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하여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로부터 한국 공동체를 책임자로 임명되어,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에 마련한 새 정착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기틀을 잡았다. 같은 해 함흥 및 덕원 교구장 서리로 임명 받았고, 1953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1954년에는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몬시뇰 칭호를 부여 받았다. 1964년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원장직을 사임하였고 199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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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1907
년 독일 쾰른 교구 니더카셀에서 출생하였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고 1929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34년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말을 배우는 동안에는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후에 여러 군데 본당에 나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1949년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가 1956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왜관 감목대리구 소속 여러 본당에서 선교하였으며, 수녀원 지도 신부로 있었다. 또한 73세의 나이로 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탕하고 곧은 성격이었으나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언제나 어깨춤을 들썩여 좌중을 흥겹게 했다. 200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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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리 비뚜스 수사


1908
년 독일 뷔르쯔부륵 교구 미헬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7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39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 되었다. 수도원에서 오리 키우는 일을 해서 오리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제본 장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다른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1959년에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오랫동안 인쇄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외원 사무를 보다가 은퇴하였다. 한결 같은 노동과 기도의 삶으로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젊은 형제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천수를 누리다 2003년에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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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수녀원


1925
년 당시 원산 대목구장이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초청으로 독일 툿찡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원산으로 파견되었다. 툿찡 수녀원은 오틸리엔 수도원과 더불어 1885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선교 베네딕도회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남녀 두 수도공동체를 창설하였는데 두 공동체가 협력하여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1927년 원산 분원이 자립수녀원으로 승격되었고 수녀들은 덕원 수도원이 펼치고 있던 선교 활동인 본당사목, 교육사업에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도 병원, 시약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회와 지역 주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되자 남한으로 피난해온 수녀들이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 오늘날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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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스위스 죽
(Zug)주에 위치한 캄 수녀원은 연길 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31 9 14 6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다. 1945년까지 모두 7개의 본당에 지원을 설립하면서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사업을 동반하였다. 1946년 수녀원을 폐쇄되고, 1951년 모든 서양 수녀들이 중국을 떠났다. 한국인 수녀들은 1947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와 경기도 소사에서 공동체를 꾸렸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에서 수련소를 다시 열었고, 1955년에 연길 수녀원이 폐쇄된 후 첫 종신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동체가 성장해 오늘날 한국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회가 되었는데 부산 광안리에 본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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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요셉 선생


1890
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숭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울 백동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원산 해성 학교를 비롯하여 덕원, 고원, 신고산 등 각지에 본당 11개소, 학교 10개소를 설립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1940년부터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비서직로 일했고, 독일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부터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당시 원산이 회복되었을 때 UN군의 도움으로 원산 가톨릭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성주에 정착했고 17년간 성주 본당 회장으로 있으면서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에 협력하였다. 1969년 교회와 수도원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12 25에 선종하여 평신도로서는 유일하게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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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6.25
전쟁이 발발하고, 헤어져 있던 덕원 수도원 수사들이 부산 중앙성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8명의 수사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여기에는 연길과 함흥 교구 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맥카아티 신부는 아메리카 카시노 연합회 소속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의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어렵게 피난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맥카아티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와 여러 모로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맥카아티 신부의 주선으로 공동체는 1951년에 대구 교구 주교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 할 때까지 공동체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간 맥카아티 신부는 1963년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2000 2 5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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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업 마리아 여사


1951
년 대구에서 돌아가신 덕원 수도원 출신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서모이다. 홍콩으로 이민 가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재산을 모았는데 평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동호 쁠라치도 아빠스가 연합회 일을 보러 유럽을 왕래하다가 홍콩을 경유하곤 하였는데 그때 여사를 만났고 왜관 수도원에 새로운 성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자신이 애써 모았던 재산을 봉헌하여 성당 신축비용 대부분을 대었다. 1975년 수도원 성당이 완공되면서 성당 출입구 벽면에 기념 표석을 새겨 그분의 장한 뜻을 기렸고, 1976년 수도원 측에서는 교황 강복장을 전달하였다. 198857에 선종하였고 그분의 원의에 따라 수도원 묘지 곁에 안장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 (190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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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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