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Front Page
Tag | Location | Media | Guestbook | Admin   
 
'올리베따노'에 해당하는 글(5)
2010.03.22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2008.05.22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서의 부활 성삼일 전례
2008.04.15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2008.04.04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1
2008.02.26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한국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과 수녀원들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왜관 수도원에 속한 공동체는 분원들도 표시하였고, 다른 수도 공동체들은 본원만 표시를 하였습니다. 지도 아래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면 더 큰 화면에서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색깔별로 된 표식을 클릭하면 각 공동체의 홈페이지 주소가 적힌 풍선이 나타납니다. 왼쪽 상단에 있는 + - 를 눌러 지도를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습니다.


View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회들 in a larger map [확대]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서의 부활 성삼일 전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도원 성당 안에 '프란치스코 로마나' 성녀의 경당이 있다. 그 제대 앞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조각상이 항상 모셔져 있었다. 성 금요일 저녁에는 이 상을 제대 앞에 모셔 두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성 금요일 밤. 제대 앞에 흰 천을 걸친 십자가와 예수님 상을 모셔다 놓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 토요일. 부활 성야 미사의 부활 초 축복.
성당 앞 마당에 불을 아주 크게 피워놓았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년 동안 아빠스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미켈란젤로 아빠스님. 수도원에서 몇 개의 본당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아빠스님들을 Abbas Nullius (이태리말 : abate territoriale)라고 한다. 관할 지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관 수도원의 아빠스님 역시 Abbas Nullius 이시다. 그 관할 지역은 북한에 있는 옛 덕원 수도원 지역이다.

이러한 '자치 수도원구'는 작은 교구와도 같은데, 사진 중간에 계시는 분이 그 교구의 총대리를 맡고 계시는 신부님이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활 성야 미사 말미에 계란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봉헌한 빵도 축복한 다음에 신자들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살아 있는 '어린 양'을 바구니에 담아서 봉헌하고 축복하였다. 그 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성당 한 쪽에 둔 어린 양이 울어 대는 통에 수도자들이 서로 마주보고 웃곤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활 대축일 미사 전 행렬.

수도원은 네모 나게 회랑이 있고, 그 회랑의 벽에는 성 베네딕도의 생애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었다. 장엄하게 행렬할 때는, 제의방에서 출발하여 이 회랑을 한 바퀴 돌고 성당으로 입장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촬영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아빠스님께 허락을 청했다. 흔쾌히 승락을 해 주셨다. 그리고 원장 신부님과 다른 형제들에게도 휴게 시간에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신부님은 부활절에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방문하시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셨다. 찍은 모든 사진은 휴게실에 있는 공동 컴퓨터 속에 넣어 두었다. 흰색 수도자들(몬떼 올리베또의) 사이에서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이 방문한 신자들에게도 낯선 광경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뜻한 환대를 베풀어 준 몬떼 올리베또의 형제들에게 감사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내부 사진들을 몇장 올려 본다. 이 곳 수도원 방문 소감은 수도원 발행 잡지 [분도 芬道] 여름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당의 중심인 제대. 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형제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아담하게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젊은 형제들이 많아서인지 성가 소리는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수도자들의 기도석인 '코러스'(가대)는 제대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미사 이외의 모든 기도는 코러스에서 거행하였다.

외국에 와서는 기도석에 무릎을 꿇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체형이 서양 사람들 그것과 달라서인지, 정강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높이와 딱딱하기가 왜관의 장궤틀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왜관 수도원에 있던 내 체형에 딱 맞는 기도석이 그리워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 금요일 밤에 찍은 사진이다.

제대 앞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모습을 묘사한 전신상을 갖다 놓았다. 뻬루쟈(Perugia)에서 이태리말을 배울 때 보니까, 성 금요일 밤에 신자들이 이 상을 모시고, 골목 구석 구석을 돌며 수난 예식을 하였다. 신자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메고 가고, 중간 중간에 멈춰서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였다.

이 수도원에서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 날 밤에 비가 무지 무지하게 내렸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연세 드신 수도자들을 제외한 모든 수도자들이, 저녁 식사 후에 인근 교구에서 있었던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석하였다.

끝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에 도착하니까, 연세 드신 수사님 몇 분이 개별적으로 기도를 하고 계시고, 다른 분들은 오지 않았다. 물어보니, 다른 곳에서 하는 십자가의 길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이 분들과 함께 TV방에서, 로마의 꼴로세오(꼴로세움)에서 교황님과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보았다. 로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십자가 옆에 휏불을 들고 있는 남녀 한 쌍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꼬박 비를 맞고 있었다.

교황님과 성가대는 텐트 안에서 기도를 바쳤는데, 텐트에 고인 물이 연신 떨어지는 것이 텔레비젼에 비쳤다. 신자들은 추운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꼴로세오 주위에서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올해 꼴로세오에서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중국 교회가 많이 부각되었다... 각설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레스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진 수도원 복도.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벽화에 옮겨 놓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그림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왜관에 있을 때, 수도원에서 보았던 책 속의 많은 그림들이, 이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베네딕도 성인이 수비아꼬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계실 때, 로마누스가 절벽 위에서 음식을 내려 주는 장면.

이곳에 그려진 모든 벽화에는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고 있다. 올리베따노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기 때문인 것 같다(white monk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 건물은 성당과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건물이다. 오른쪽 건물은 일반 신자들이 방문하여 머물 수 있는 건물이고, 기념품 가게도 있다. 엽서나 사진, 책들, 수도원에서 만든 포도주, 전통의 비법으로 제조된 화장품이나 비누 등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도원 식당.
넓고, 많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떤 수도원에 가 보면, 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일부러 밥 맛이(빵 맛인가?!!) 떨어지는 그림을 식당 벽과 천장에 그려 놓은 경우가 있다!!~~ 여기는 그렇지는 않았다.  

식사 때는 침묵을 지키고 독서를 들었다. 성 금요일에는 아빠스님께서 직접 식사 중에 독서를 읽으셨다.

음식이 나올 때 마다 여러 형제들이 봉사를 하여 음식을 분배하였다. 단 주의 사항!!  한번 지나 간 음식 접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서는 음식 접시를 두 번 돌린다. 부족하면 더 덜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남은 음식은 바로 주방으로 직행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빼 놓을 수 없는 곳.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원의 포도주 저장 창고.

5,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내 키보다 더 큰 포도주 통들이 지하실 양 옆으로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이 통들이 오래 되어서 여기에 포도주를 저장하지는 않고, 다른 곳에서 제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 반경 몇 십 킬로 이내에 유명한 포도주 산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가장 유명한 토스카나의 끼안티 포도주, 몬떼풀챠노, 몬딸치노 ...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한국에는 두 곳에 남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다. 한 곳은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http://osb.or.kr )이고, 다른 한 곳은 경남 고성군에 있는 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http://osb.brothers.or.kr) 이다.  

    왜관 수도원독일 뮌헨 근처의 샹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에 의하여 한국에 세워졌고, 고성 수도원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또(Monte Oliveto Maggiore) 수도원을 총원으로 하고 있다.
 
    베네딕도회는 자치적인 성격이 강한 수도회라서, 지역이나 설립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연합회로 나뉘어진다. 왜관 수도원과 고성 수도원은 같은 베네딕도회이지만, 다른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인 셈이다.


이태리에 머무는 동안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성주간 동안에 방문하게 되었다. 성주간에 로마에 머물러야 하나, 다른 곳을 방문할까 고민하다가 성주간 1주일 전에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의 아빠스님께 메일을 드렸다.
 
"가도 될까요?"  다음날 아침에 바로 팩스로 답이 날아왔다. "당연히 와도 되지!!" 그리고 오는 방법까지 팩스 용지에 가득 적어 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18년 동안 수도원장직을 수행하고 계신 아빠스님은, 내가 다니고 있는 라떼란 대학교에서 사목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무척 활기 있고 친근감 있게 맞아주셨다.

의정부 교구 신부님 한 분과 함께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아쉬아노(Asciano)역. 도착해서 전화를 하면 수사님이 마중을 나오신다고 했다. 중간에 Chiusi 에서 시에나 행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기차편이 많지 않은 노선이라서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길로 계속 가면, 가타리나 성녀로 유명한 '시에나'가 나온다. 그리 멀지 않은 듯.

기차 철길 옆으로는 넓은 밭들과 벌판이 펼쳐져 있고, 먼 산의 구릉에는 새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냥 느낄 수 있는 풍광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sciano 라는 동네는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기차 역이 두 개나 있었다. 역 이름이 Asciano Monte Oliveto Maggiore 였다. 수도원 이름을 딴 역이었다.

이런 것 까지 미처 알지 못한 우리는 다른 역에서 내려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근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우리를 태우러 테오도로 수사가 나왔다. 다른 역에 갔다가, 필시 잘못 내렸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정말 이 작은 촌 동네에 역이 두 개나 있을 줄이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를 타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봄이라 풀이 자라기 시작한 구릉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달렸다. '야!!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경치에 취해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은 돌아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테오도로 수사가 중간 중간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차를 세워주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착한 날은 이렇게 날씨가 좋았는데, 그 다음 부터 성주간 내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계속 내리고, 먼 산 높은 곳에는 눈도 보이고... 무척 추운 성주간을 보냈다. 해발 500 미터에 있는 수도원의 방은 정말 추웠다!!  간간이 스팀이 돌긴 했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 날에는 아빠스님이 며칠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우리를 위해, 옆 동네에 미사를 하러 가시면서 우리를 태우고 가셨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중세의 성곽 도시를 둘러 보라고 하셨다. 그 때 3,40분 동안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미사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날씨가 악화되더니만, 우박까지 퍼붓기 시작하였다.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을 다녀 오는데 이런 꼴을 당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hiusure 라는 중세 성곽 도시에서 내려다 본 풍경. 멀리 구릉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곳은 인근에 시에나피렌체라는 강력한 도시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배하에 늘 있었다. 중세로 부터, 이들 도시간의 경계 지점에 있는 성채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hiusure는 다른 곳 보다 높은 곳이라서 주변 경치가 좋았고, 자그마한 도시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 수도원도 보였다.

수도원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도원과 조금 떨어져 있지만, 수도원 들어가는 길목에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고, 주차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지만, 예전에는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마 유사시에는 다리를 들어 올리고 접근을 차단했던 것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도원 안 쪽에서 바깥으로 바라 본 장면>> 

성문을 통과하여, 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 수도원 입구에 일반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안내문이 영어, 독일어 등으로도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머무는 것 같았다. 그 집에 딸린 수도원 기념품점도 있었다.

오랫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인 만큼(1313 년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수도생활 시작) 수도원 내부에 볼거리도 많았고, 수도자들의 기도도 아름다웠다.  늘 수도원 앞에는 내부 관람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 기념품점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기 위해 오는지는, 개봉 박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작성할 예정임.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왜관 수도원은 2009년에 백주년을 맞이한다(1909-2009).
 
1909년 독일 뮌헨 인근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Sankt Ottilien)의 수도자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시작된 것이 마치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한국 전쟁의 와중에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하느님의 섭리는 수도자 공동체와 늘 함께 하셨다.

북한 땅에서 피를 흘리신 수도원 장상과 수도자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은인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했던 많은 수도자들과 은인들...

달력의 첫 장에 적힌 것 처럼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며" 라는 문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1.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를 파견한 분

2.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 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3.        백화동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설립자

4.        김영근 베다 신부 - 피난공동체 장상

5.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설립자

6.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신부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7.        백오리 비뚜스 수사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수사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8.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 덕원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9.        스위스 캄 올리베따노 수녀회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 연길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10.     오병주 요셉 선생 – 덕원,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 협력자

11.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 은인(피난공동체를 도우신 분)

12.     임정업 마리아 여사 – 은인(왜관 수도원 성당 봉헌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1870
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95년 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 달 뒤에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897년 첫 서원을 했다. 1902년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국에 진출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순방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 받았고, 어려운 수도원 사정에도 불구하고, 1908년 선교사를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방문 중에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해 독일로 가져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금강산이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한국문화를 유럽에 알렸다. 1931년 총아빠스직을 사임하고 동아프리카 페라미호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564 3에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87
년 독일 풀다 교구 오베루프 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08년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 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화동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1889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오토보이렌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교육, 출판, 자선사업을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1950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영근 베다 신부

191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고 1943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9년 덕원 수도수도 폐쇄될 때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로부터 장상권을 위임 받은 노 안셀모 신부가 당시 차부제였던 김 베다 신부를 한국인 수사들에 대한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교회와 연합회에 덕원 수도원 상황을 알렸고,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새로 꾸려진 피난 공동체의 생계와 영성을 책임지며 1952년 장상으로 임명된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실질적인 장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사목과 피정집 책임, 분원장, 수녀원 지도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김 베다 신부는 강론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02년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1905
년 스위스 바셀 교구 로어에서 태어났다. 1927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군데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수를 맡기도 하였다. 1947년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불안한 한국 내 정치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하여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로부터 한국 공동체를 책임자로 임명되어,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에 마련한 새 정착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기틀을 잡았다. 같은 해 함흥 및 덕원 교구장 서리로 임명 받았고, 1953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1954년에는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몬시뇰 칭호를 부여 받았다. 1964년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원장직을 사임하였고 1990년에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1907
년 독일 쾰른 교구 니더카셀에서 출생하였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고 1929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34년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말을 배우는 동안에는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후에 여러 군데 본당에 나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1949년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가 1956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왜관 감목대리구 소속 여러 본당에서 선교하였으며, 수녀원 지도 신부로 있었다. 또한 73세의 나이로 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탕하고 곧은 성격이었으나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언제나 어깨춤을 들썩여 좌중을 흥겹게 했다. 2000년에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오리 비뚜스 수사


1908
년 독일 뷔르쯔부륵 교구 미헬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7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39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 되었다. 수도원에서 오리 키우는 일을 해서 오리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제본 장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다른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1959년에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오랫동안 인쇄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외원 사무를 보다가 은퇴하였다. 한결 같은 노동과 기도의 삶으로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젊은 형제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천수를 누리다 2003년에 선종하셨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산 수녀원


1925
년 당시 원산 대목구장이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초청으로 독일 툿찡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원산으로 파견되었다. 툿찡 수녀원은 오틸리엔 수도원과 더불어 1885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선교 베네딕도회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남녀 두 수도공동체를 창설하였는데 두 공동체가 협력하여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1927년 원산 분원이 자립수녀원으로 승격되었고 수녀들은 덕원 수도원이 펼치고 있던 선교 활동인 본당사목, 교육사업에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도 병원, 시약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회와 지역 주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되자 남한으로 피난해온 수녀들이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 오늘날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되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스위스 죽
(Zug)주에 위치한 캄 수녀원은 연길 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31 9 14 6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다. 1945년까지 모두 7개의 본당에 지원을 설립하면서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사업을 동반하였다. 1946년 수녀원을 폐쇄되고, 1951년 모든 서양 수녀들이 중국을 떠났다. 한국인 수녀들은 1947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와 경기도 소사에서 공동체를 꾸렸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에서 수련소를 다시 열었고, 1955년에 연길 수녀원이 폐쇄된 후 첫 종신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동체가 성장해 오늘날 한국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회가 되었는데 부산 광안리에 본원을 두고 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병주 요셉 선생


1890
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숭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울 백동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원산 해성 학교를 비롯하여 덕원, 고원, 신고산 등 각지에 본당 11개소, 학교 10개소를 설립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1940년부터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비서직로 일했고, 독일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부터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당시 원산이 회복되었을 때 UN군의 도움으로 원산 가톨릭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성주에 정착했고 17년간 성주 본당 회장으로 있으면서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에 협력하였다. 1969년 교회와 수도원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12 25에 선종하여 평신도로서는 유일하게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6.25
전쟁이 발발하고, 헤어져 있던 덕원 수도원 수사들이 부산 중앙성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8명의 수사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여기에는 연길과 함흥 교구 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맥카아티 신부는 아메리카 카시노 연합회 소속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의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어렵게 피난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맥카아티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와 여러 모로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맥카아티 신부의 주선으로 공동체는 1951년에 대구 교구 주교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 할 때까지 공동체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간 맥카아티 신부는 1963년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2000 2 5에 선종하였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정업 마리아 여사


1951
년 대구에서 돌아가신 덕원 수도원 출신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서모이다. 홍콩으로 이민 가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재산을 모았는데 평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동호 쁠라치도 아빠스가 연합회 일을 보러 유럽을 왕래하다가 홍콩을 경유하곤 하였는데 그때 여사를 만났고 왜관 수도원에 새로운 성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자신이 애써 모았던 재산을 봉헌하여 성당 신축비용 대부분을 대었다. 1975년 수도원 성당이 완공되면서 성당 출입구 벽면에 기념 표석을 새겨 그분의 장한 뜻을 기렸고, 1976년 수도원 측에서는 교황 강복장을 전달하였다. 198857에 선종하였고 그분의 원의에 따라 수도원 묘지 곁에 안장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 (1909-2009)




BLOG main image
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Notic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34)
수도원들 (15)
역사의 그 자리 (3)
일상의 주변들 (13)
사람의 향기 (2)
(1)
 TAGS
수녀원 트라피스트 이태리 뮌헨 올리베따노 아빠스 수도원 교황 Sankt Ottilien 은수처 아레쪼 재의수요일 Monte Oliveto cella La verna 선교 토스카나 상트 오틸리엔 St.Ottilien 은수생활 선교사 Sant'Anselmo 베네딕도 로무알도 까말돌리 몬떼올리베또 덕원수도원 이탈리아 베네딕도회 백주년 사순절 교황청 왜관수도원 매립지 Ottilien 분도회 Camaldoli 조선소 오틸리엔 마산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Entrie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Archive
 Link Site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자유게시판
평화신문
가톨릭 신문
pacom.tistory.com
인 끌레멘스 신부
이탈리아어-한글 사전 Anselmus
연합뉴스
한RSS
CEI-이태리 주교회의
교황청 성직자성
로마 교구 소식
 Visitor Statistics
Total :
Today :
Yesterday :

Skype Me™!
위 버튼을 누르면 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