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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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들'에 해당하는 글(15)
2010.03.22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2010.03.22   Camaldoli - 까말돌리 수도원
2010.03.03   유럽 수도원 기행7-아일랜드의 글렌스탈 수도원-최종근 빠꼬미오 신부 글 4
2009.08.08   까말돌리 수도자들의 은수처 - Sacro Eremo 2
2009.07.28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까말돌리 수도원 4
2008.08.14   치르꾸스(서커스) 상트 오틸리엔 2008 (Circus St. Ottilien) 5
2008.08.14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수석 아빠스의 록 콘서트 연주 4
2008.07.14   베네딕도 축일 미사후 8
2008.05.22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서의 부활 성삼일 전례
2008.04.15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2008.04.04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1
2008.01.02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2008.01.02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의 식당과 친교의 모임
2008.01.02   판논할마 수도원의 도서관
2007.12.31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12월 24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한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
한국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과 수녀원들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왜관 수도원에 속한 공동체는 분원들도 표시하였고, 다른 수도 공동체들은 본원만 표시를 하였습니다. 지도 아래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면 더 큰 화면에서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색깔별로 된 표식을 클릭하면 각 공동체의 홈페이지 주소가 적힌 풍선이 나타납니다. 왼쪽 상단에 있는 + - 를 눌러 지도를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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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aldoli - 까말돌리 수도원

블로그에 까말돌리 수도원에 대해서 두 번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간혹 방문하려는 분들의 연락이 있네요. 위치와 가는 방법을 올려놔 봅니다. 이곳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있는데,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한 은수처(Sacro Eremo)가 있고, 그 아래 동네에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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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하면 더 큰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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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 : 해발 800 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단체 피정을 위한 시설이 있고, 강좌나 학술발표회 등이 자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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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수처 : 이곳은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수도자들이 각자의 은수처에서 생활한다. 젊은이들을 위한 집과 피정의 집이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 수도원 기행7-아일랜드의 글렌스탈 수도원-최종근 빠꼬미오 신부 글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09년 겨울호에 실린 최종근 빠꼬미오 신부의 글입니다. 



길을 나선 고양이 수사



나는 정주를 아주 잘 한다. 고양이가 자기 사는 장소를 떠나지 않듯, 나도 한번 자리 잡은 곳은 잘 떠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냥 한 곳에 짐을 풀고는 낮잠을 자든지 쥐를 잡든지, 아무튼 혼자서도 내 할 일 하며 잘 노는 편이다. 내가 정주 서원을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이런 나의 고양이 같은 습성에, 꼼짝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즘이 더해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로마의 안셀모 수도원은 좀 이상한 수도원이다. 여름방학만 되면 칠월부터 삼 개월 동안 방 빼고 떠나 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방학이 되었으니 자기 수도원에 돌아가라는 말이지만, 그건 유럽 수도원들에서 온 수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처럼 제3세계에서 온 수사들은 이때부터 방랑 수도자의 삶, 소위 '기로바꾸스' 생활이 시작된다. 


물론 이 시간은 어학연수를 하거나 유럽의 명소인 큰 수도원들을 방문해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건 맞지만, 집을 떠나 들개인양 돌아다녀야 하는 고양이에게는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너무 그러면 사람이 소심하고 마음이 쪼짠하단 소리를 듣기 때문에, 내 안의 고양이 한테는 미안하지만 때론 그냥 냅다 신천지에 몸을 던져버리곤 한다. 지난 여름에도 그랬다. 수사님들과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 영어 회화나 실컷 해봐야지 하는 생각에 아일랜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찾은 곳이 아일랜드 전체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글렌스탈Glenstal 수도원이었다.



숲속의 수도원


일단 가기로 결심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려나갔다. 구글 지도에서 수도원 위치를 확인한 다음, 그곳에서 한달간 좀 지낼수 있는지 문의메일을 보냈더니 두말 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라고 즉시 답장이 왔다. 곧 바로 인터넷검색으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로마에서 더블린까지 22유로에 가는 저가 항공권을 구입했다. 우리 돈으로 약 4만원밖에 하지 않으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더블린 공항에 내려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두서너 시간을 달려 리머릭Limerick이라는 도시까지 가야했다. 생전 처음 가는곳은 교통요금이나 운행방식이 생소할때가 많아서 아차 실수하면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는 안셀모수도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나이지리아 친구 다미안 수사가 동행한 덕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 다미안 수사와 >>


다미안은 매년 방학 때마다 자기 모원인 글렌스탈에 가서 지낸다고 했다. 리머릭시 보다 한 정거장 앞인 리머릭 졍션Limerick Junction에 내리자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에서 한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더니 우리쪽을 향해 "헤이, 다미안! 다미안!"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 위에 작업복 같은 양복 재킷을 입고, 영화배우 숀코네리처럼 희고 멋진 구레나룻 수염을 종종 만지작거리면서, 시종일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와 농담을 던지셨던 그분은 킬론Cillon 수사였다. 


역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수도원까지 우리를 태우고 가는 동안, 아일랜드의 칙칙한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수도원에서 부원장급으로 대우받는 자기 애완견 이야기까지, 정말 지루할 순간도 없이 함께 깔깔거리며 즐거운 드라이브를 했다. 수도원에 도착할 즈음, 근처 애완동물 가게에 잠깐 들르더니 외상으로 샀다며 개밥 한자루를 차에 싣고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진입로 좌우로 비에 젖은 초원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아름드리 거목들이 솟아 있었다. 

 

한참을 들어가도 수도원이 안 보이길래, 수도원 땅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지 물어 보았더니, 5백 에이커라고 한다. 나중에 평수로 계산해 보았더니 61만 2천여 평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숲속 수도원에서 여름동안 은거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가슴 뿌듯해서, 그때 마침 영국 암플포쓰Ampleforth 수도원에서 지내 고 있던 박블라시오 신부에게 전화해서 자랑했더니, 다음날 바로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암플포쓰는 2천 에이커라고 했다.



숲속 수도원의 비밀


글렌스탈 수도원은 벨기에의 마레쭈Maredsous 수도원1927년 아일랜드에 설립한 수도원 이다. 마레쭈 수도원은 2000년도에 요한 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콜룸바 마르미옹 Columba Marmion이 아빠스로 있던 곳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처음에는 아일랜드 교구 신부였다몇년 동안 교구 내 여러 중책을 맡기도 하고 영적지도자로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되었다


 

1923년 마르미옹이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마레쭈수도원에서 그를 기념하여 4년뒤 아일랜드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훌륭한 영성서적을 많이 써서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그 덕분에 원래 맥주와 치즈로 유명했던 마레쭈 수도원이 갑자기 영성의 중심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한편 어떤 수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글렌스탈 수도원이 세워질 때 만해도마레쭈 수도원이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 마르미옹 아빠스가 쓴 책들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많아진 돈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까 고민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재테크 전문가가 마레쭈의 당가 수사에게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게 최고!”라고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마레쭈 수도원은 그 조언을 당장에 실행에 옮겼는데, 그리고 얼마 안 있 어 세계 경제 대공황이 불어 닥쳤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마레쭈 수도원은 청빈의 영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결국 모원의 지원이 뚝 끊긴 글렌스탈 수도원은 걸음마 때부터 자력갱생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고 한다.


 


샤크(상어)가 누구지? 


글렌스탈 수도원이 차지하고 있는 그 넓은 땅은 본래 벨기에 수사들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영국 귀족 가문의 소유였다. 런던의 윈저성을 본 뜬 대저택을 짓고 아일랜드인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유복한 삶을 살고 있던 그 영국인 가족은 어느날 그만 슬픈 변을 당하고 말았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800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고 독립하려고 몸부림치던 1920년대 무렵그 영국 귀족의 딸이 아일랜드 독립군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숨지는 일이발생했다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글렌스탈의 모든 건물과 땅을 버려둔 채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나중에 이곳을 교구에서 매입하였고 이 넓은 땅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우는 조건으로 마레쭈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 학교 >>


현재 성당과 수도자 숙소, 피정집 및 도서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남자 기숙학교로 쓰이고 있다. 선생 수사의 안내로 학교 안을 둘러보았다. 초중고 학생들이 다함께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어린이집 처럼 앙증맞게 꾸며놓은 교실에서부터 대학 강의실처럼 빔프로젝트까지 설치해 놓은 방까지 시설들이 참 다양했다. 방학이라 학교가 텅 비어 있은 덕분에 개인 침방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두 평 남짓한 조그만 침실에는 공사 중이었는지 신발자국이 군데 군데 묻은 헌 신문지들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보았는데 벽지를 바르지 않아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회색빛 벽면에는 빨간 유성 매직으로 그린 낙서가 보였다. 방주인의 자화상인 듯한 얼굴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었다


계단을 돌아 내려오니 식당이 몇 개 있는데, 학년별로 따로따로 밥을 먹는다고말했다복도를 지나 입구쪽으로 가자 게시판이 보였다. 학교 생활하며 찍은 사진들이 그 위에 잔뜩 붙어 있었다그 중에 몇장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하늘색 양장을 차려입은 부인이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진이 있기에, 안내를 해주던 수사한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샤크Shark”라고 했다.  ‘샤크? 상어?’ 하며 어리둥절해하니까, 아일랜드 대통령을 자기들은 ‘상어’, 즉 ‘샤크’라고 부른다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 대부분의 수사들이 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어서인지 수도생활 또한 학교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받았다작년말 8년 임기의 새 아빠스로 선출된 패트릭 수사Br. Patrick 역시 한때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고 한다.



아빠스는 아무나 하나?


패트릭 아빠스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내가 그동안 유럽에서 만난 아빠스들이 대개 다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신 분들이었지만, 패트릭 아빠스는 저러시다 권위가 손상되면 어쩌나 염려될 정도로 타고난 익살꾼이었다. 그런데 이분 은 수도생활 45년 동안 평수사로 잘 살아오시다가 그만 아빠스에 당선되었다. 현 교회법상 신부만 아빠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아빠스로 뽑힌 데는, 물론 패트릭 아빠스의 덕망도 있었겠지만, 내가 들은 첩보에 의하면 공동체 전체의 강력한 염원이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유럽식 낫질을 보여 주는 패트릭 아빠스 >>


바티칸의 허락을 받고 아빠스로 먼저 선출된 다음에 준비되는 대로 차례차례 부제품, 사제품을 받았다. 예전부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였는지 아빠스가 되신 뒤에도 여전히 미사때 성가대 사이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내게는 약간 생소했지만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빠스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공동체 전체회의에 손님인 나도 참석해도 괜찮다고아니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여 몇번 가서 앉아 있어 봤는데, 듣고 있자니 공동체의 현안들을기탄없이 서로 나누고 있는게 아닌가나 외에도 견학 온 성소자도 한 명 같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가니까 앞으로 입회해서 살 수 있겠는지 잘 판단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곳 수사들에게서 받은 공통적인 인상은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 손님 안내를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신부였다. 다른 수도원과 달리 이 수도원에서만 본 관습이 하나 있는데매일 저녁식사 때 피정온 손님들과 함께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다. 수사들 이 모두 식당에 모여 있으면, 크리스토퍼 신부님이 남녀가 섞여 있는 손님 일 고 여덟분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와서 손님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서 같이 식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사실 수도원 식당에서 여자는 말 할것도 없고 일반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인데, 환대를 표현하는 방식이 이렇게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뭐든지 절대적으로 옳은 관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다른날 처럼 비오는 날 오후주방에서 다미안과 잼 만들려고 따놓은 구즈베리 열매를 다듬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신부가 다가 와서는 왜관에 돌아가면 시몬 아빠스께 안부 전해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시냐고 여쭈었더니로마에서 4년마다 열리는 아빠스 총회때 만났다고 하셨다. 알고 봤더니 이분이 바로 패트릭 아빠스 전에 16년 동안 아빠스로 계셨던 분 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서 그런지 얼굴에서 행복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섬 구경을 나선 고양이 수사


한편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글렌스탈 수도원이 워낙 시골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차가 없으면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데다가, 한 달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죽죽 내리니 어디 나다니기도 귀찮았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극히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정원에서 일하시는 브라이언 신부가 나를 위해 하루소풍을계획했다.

                                                 << 브라이언 신부 >>


수련장 신부한테 부탁해서 운전자로 수련자 한 명까지 구해 놓고는 좋은데 같이 구경가자고 했다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는데 가보면 놀랄거라고 말하긴 했어도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아침을 일찍 먹고 승용차에 올라타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국도를 고속도로 처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아일랜드 서해안의 모어 절벽Cliffs of Moher이었다. 2백 미터가 넘는 높이에 장장 8킬로미터 뻗어있는 해안 절벽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이런 기가 막힌 관광지에도 다 와보고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며 사진도 찍으면서 이 놀라운 장관을 마음속에 깊이 깊이 담았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안개와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좀전까지 그토록 투명하게 빛나던 해안선이 안개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빠코미오! 우린 아주 운이 좋았지, 그치?” 브라이언 신부님의 말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며 멀리 도로 앞을 보니, 아마도 더블린에서 오는 차들인지 모어 절벽을 보러 오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복도 많고 운이 좋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일 년 열두 달 이렇게 매일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토사가 바다로 많이 씻겨 나간다그래서 지형이 꼭 달 표면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농사와는 영 거리가 먼 환경처럼 보였다. 그나마 아무데서나 잘 크는 감자 덕분에 아일랜드에 사람이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1845 년부터 1851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대기근 동안 백만 명 이상 굶어죽었다는 역사가 왜 가능했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가혹한 영국 식민지배를 받으며 굶고 지친 아일랜드인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아메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던 곳, 바로 그 항구가 모어 절벽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출발한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브라이언 신부와 점심 먹으러 들어간 어느 해안가 식당에서도 그런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1912415일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대한 당시의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식당 벽 액자에 넣어 걸려 있었다. 달을 탐사하는 듯 해안 구석구석을 돌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사진 찰칵 찰칵 찍고, 다시 또 출발하고,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무렵 수도원에 돌아왔다. 이 날 말고도 브라이언 신부는 내가 아일랜드 정통 아침식사가 뭔지 맛봐야한다며 일부러 리머릭 시내 관광 일정까지 마련해 주었다. 글렌스탈을 떠나오는 날, 빠코미오가 봐야할 게 아직 많은데 이렇게 일찍 가서 아쉽다며 성탄 때 꼭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사랑이란 다름을 인정하는 일


글렌스탈 수도원을 떠나온 지도 벌써 반 년이 다 되어 간다. 성탄 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 아일랜드에서 못 다한 구경 때문이 아니라 브라이언 신부와 패트릭 아빠스 그리고 여러 수사들이 보고 싶어서이다. 세상 모든 수도원을 다 다녀 보고 체험해 볼 수는 없지만, 가는 곳마다 참 보고 배우는 게 많다


하느님 찾는 목표는 같아도 역사와 문화가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다르다.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고 이해하면 할수록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대신 두루 뭉술한 식별이긴 해도 사랑하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에 정주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 만족에 안주 하고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여행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잠시 고양이의 삶을 버리고 들개처럼 돌아다닌 지난 여름이 은총의 시간이라 느껴진다. 책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랑을 배우라는 하느님의 뜻이리라



 



까말돌리 수도자들의 은수처 - Sacro Er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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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 성당.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그린 벽화가 정면에 있다. 이곳 은수처의 주보축일이다. 이날 아랫동네에 살고 있는 까말돌리 수도자들도 함께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 성당의 천사 조각상. 두 마리의 비둘기가 하나의 잔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 측면과 활동적 측면을 상징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수도원 곳곳에서 이 문양을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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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무알도 성인의 은수처. 다른 수도자들의 은수처도 이것과 구조가 같다. 중간에 보이는 작은 문이 예전에 수도자들에게 음식물을 넣어주던 문이다. 건물 안에도 똑 같은 문이 하나 더 있는데, 식사를 분배하는 수사가 음식물을 넣고 가면, 안쪽 문을 열어서 음식을 꺼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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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로무알도의 은수처 내부. 이것은 거실에 놓여 있는 탁자인데, 기도하거나 앉아서 묵상을 할 때 사용했던 것 같다. 거실 옆방에는 개인 기도실이 있어서 미사나 기도를 그곳에서 거행하였고, 공부를 하는 작은 방도 딸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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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머물렀던 은수처인 '성 마르띠노' 내부. 각 개인의 은수처 마다 성인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곳이기 때문에 한 여름에도 난로를 피우지 않으면 상당히 추웠다. 밤새 불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려면 장작을 많이 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은 불씨들을 재로 잘 덮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 때 배웠다.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장작 창고에서, 하루 동안 땔 나무들을 도끼질 해야 했다. 불을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도착한 날은 까말돌리 수사가 불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다음날 불을 꺼뜨리고 다시 피워야 하는데, 두 시간을 애를 썼는데도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았다. 장작을 아주 잘게 쪼개서 해 보기도 하고, 집 근처의 마른 나무들을 모아다가 불을 붙여 보기도 했다. 종이와 기름먹인 톱밥도 사용해 보았는데, 그 때만 잠시 엄청나게 뜨거운 불꽃이 솟는가 싶더니만 금방 사그라들곤 했다. 그렇게 해서는 장작에 불이 옮겨 붙지를 못했다. 

오후 3시 반이 지나면 찬기운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불은 붙지를 않았다. 강의록으로 부채질을 해 가면서, 방 안 가득히 들어찬 연기를 참으면서 불을 붙이려 했지만 불은 자꾸만 자기 먹을 것만 먹고는 죽어버렸다. 할 수 없이 저녁 식사 후에 다른 수사님에게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화로의 문을 닫았다. 그런데........  // 갑자기 불꽃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송풍기로 바람을 불어 넣는 것 처럼 불꽃이 위로 솟아 올랐다. 화로 문을 닫으니까 화로 아랫부분의 작은 구멍들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위의 굴뚝을 타고 빠져나가면서 엄청난 상승 기류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하도 신기해서 화로의 문을 여니 다시금 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불을 붙이려고, 입으로 불고, 책으로 부채질 한 것이 다 부질 없는 일이었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내 버려 두었을 때 저절로 더 잘 되었다!!  하여튼 매일 매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면서, 새로 불을 붙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 한 수사님의 정원. 잔디와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한 귀퉁이에 성모상과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모셔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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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9월 말 어느날. 고개를 들면 뻥 뚫려 있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수도자들의 은수처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비행기들만이 하늘에 하얀 줄을 남기면서 이곳을 지나가곤 했다. >>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까말돌리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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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말돌리 은수처 들어가는 출입문. 왼쪽에 수도원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한 겨울에 눈이 많이 오니까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여우나 늑대도 있는 모양이다. 여우에게 먹이를 주는 사진이 인상적이다...>>


  2007년 6월, 로마에서의 첫 두 학기를 연거푸 보내고 처음으로 방학을 맞이하였다. 독일로 가서 석 달 동안 지내며 독일어를 익힐까 생각하다가, 이탈리아어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여 방학을 지낼 이탈리아 수도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도원의 유학 형제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했던 이탈리아 북부의 쁘랄리아 수도원Abbazia di Praglia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이어 이탈리아 중부의 높은 산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에서 8,9월을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1일, 한 달 동안 정들었던 쁘랄리아 수도원을 떠나 깊은 산 속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을 찾아 떠났다. 먼저 기차를 타고 아레쪼Arezzo라는 곳으로 갔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고, 도레미파로 시작하는 음계명과 악보 표기법을 최초로 고안한 수도자 귀도Guido d'Arezzo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매년 ‘세계 다성음악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레쪼 역은 생각보다 컸다. 그곳에서 다시 서너 칸짜리 미니 기차로 바꿔 타고 50분 정도 걸려 빕비에나Bibbiena라는 작은 시골 역에 도착했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진 곳이었다. 역 안에서 버스표를 사면서 까말돌리 수도원에 간다고 하니까 버스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이곳은 프란치스꼬 성인이 오상을 받은 라 베르나La Verna와도 가까운 곳이라서 그곳으로 가는 순례자들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몇몇 작은 동네들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산 속 꼬부랑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산길을 한 구비씩 돌 때마다 산 위쪽으로 쑥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역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주위는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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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은수처가 있는 봉쇄구역의 출입문>>

역에서 떠난 지 30분 정도 되자 버스는 까말돌리 수도원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다. 해발 1100미터에 다른 까말돌리 공동체가 있는데, 로무알도 성인이 처음으로 은수처를 만들고 사셨던 사끄로 에레모Sacro Eremo라 불리는 곳이다. 여름철에는 방문객들이 많기 때문에 사끄로 에레모까지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내가 처음 까말돌리 수도원에 메일을 보냈을 때 손님 담당이었던 에밀리오 수사는, 8월에는 아랫쪽 공동체에서 지내고, 9월에는 위쪽 은수처에서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해볼 수 없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즉시 답장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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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기도나 공동 식사를 마치면 모두 자신의 은수처로 돌아간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라벤나Ravenna 출신의 성 로무알도S.Romualdo(951-953년경 출생-1027년경 귀천)에 의해서 설립된 수도원이다. 이곳 수도자들과 이야기 하던 중, 우리 수도원이 2009년에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하니까, 자신들은 곧 1000주년을 맞이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성인에 대해서는 베드로 다미아노가 적은 '성 로무알도의 생애'(1042년 저술)를 통해 알 수 있다. 로무알도 성인은 여러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는데, 아레쪼 인근의 까말돌리 수도원은 성인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설립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까말돌리 수도원의 특징은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면서도 은수적 고독과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도 사크로 에레모에는 로무알도 성인의 은수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른 은수처들도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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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로무알도의 은수처 위에 있는 수도원 도서관>>

수도자들의 개인 은수처cella들은 모두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도자들이 손노동을 할 수 있는 정원 혹은 텃밭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한번 꺾이면서 거실이 나타난다. 복도에는 바깥쪽으로 화장실과 장작을 쌓아두는 창고가 연결되어 있다. 외부 벽과 거실 사이에 있는 복도와 창고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배치했다고 한다. 거실에는 벽난로와 쇠로 만든 난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다 보니 한 여름에도 장작불을 피우고 지내야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행여 불이라도 꺼뜨리는 날에는 금방 추위가 엄습했다. 거실에는 기도실, 공부방, 침실이 연결되어 있다.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 세상의 소리나 소식은 봉쇄구역 앞에서 멈출 듯한 곳, 바로 그곳이 까말돌리 수도자들의 은수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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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는 기도와 미사도 각자의 은수처에서 혼자서 드렸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문을 통해서 식사를 넣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전례와 미사, 식사를 공동으로 한다. 공의회 이후에 모든 수도회들이 쇄신과 적응의 시기를 보낸 것처럼 까말돌리 수도회도 변화의 시간을 겪었다. 위에서 말한 생활양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도복을 간소화하고 기도 때에만 망토와 같은 수도복을 착용하였다. 기도도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유 선법이 아닌, 이탈리아어에 적합한 멜로디로 노래했다. 이러한 토착화를 위해 몇 십 년 동안 준비했다고 기도서 서문에 적혀 있었다. 이 대목에서 좀 생각이 많아졌다. 라틴어와 그렇게 가까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랫동안 토착화 작업을 하는데, 한국에서의 토착화 작업이란…….

까말돌리 수도회도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는 이상 손님 환대의 정신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개인 피정과 단체 피정, 젊은이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있어서 여름철 동안 늘 사람들로 붐비었다. 가톨릭 학생회 소속의 대학생들은 50년이 넘게 매 여름마다 두 주씩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이 끝나면 휴가 온 가족들을 위한 두 차례의 피정이 열리는데 이것도 벌써 몇 십 년이 되었단다. 이 행사 후에는 까말돌리회 회원들이 빠도바의 산타 쥬스티나 수도원의 전례사목연구소와 함께 학술 모임을 여는데 공의회 이후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전례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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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까말돌리의 밤나무. 이 밤나무 안에 탁자를 두고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까말돌리 수도자의 사진이 아주 유명하다.>>

그 밖에도 많은 모임들이 정기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친 이들이 평안하게 밤나무 길을 산책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산 속에 깊숙이 있는 수도원은 신자들에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영적으로도 충전할 수 있는 공간, 언제든 찾아가면 반가이 맞아 주는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도자 공간은 손님 공간과 잘 구분이 되어 있어서, 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까말돌리 수도원들 중에는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몬테꼬로나Montecorona 계열의 수도원들도 있다. 산의 맑은 정기를 머금고 있는 수도자들과 생활하다보면 많은 것들이 단순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에게서 느꼈던 인간미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떠오른다. 또 다시 여름. 높은 산의 긴 겨울과 짧은 봄이 지나고 또 다시 그 향기에 이끌린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오리라. 지난 천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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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이 넘으셨지만, 주방 설걷이를 할 때 항상 형제들과 함께 하시는 안드레아 수사님>>


참고할 만한 누리집
http://www.camaldoli.it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이탈리아)
http://www.camaldolese.org 몬테꼬로나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미국)
http://osb.or.kr 수도승 영성 자료실- '성 로무알도와 까말돌리회 영성'




치르꾸스(서커스) 상트 오틸리엔 2008 (Circus St. Ottilien)

오틸리엔의 수사들이 자꾸 치르꾸스(circus)를 한다고 그런다. 그게 뭔가 했더니 서커스였다.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면서 보니까, 수도원 입구 큰 공터에 뭔가를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서커스 천막이 하나 떡하니 쳐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으로는 물건을 팔 수 있는 통나무형 부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원 게시판에도, 수도원 인근 곳곳에도 Circus St. Ottilien2008 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뭔가 대단하게 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도원 주관이라고 해서, 수도원에서 서커스단을 초청해서 공연을 하도록 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사들이 자꾸만 정말 재미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입장료를 받는데, 수도자들은 그냥 입장하면 된다고 그랬다. 기간은 대략 10일 정도 하는데, 서커스 기간 동안 다른 여러가지 행사들도 열리곤 했다. 드디어 개봉하는 날. 카메라를 챙겨들고 서커스 텐트 입구로 갔다. 수도복을 입진 않았지만, 수도자라고 하니까 입구를 지키는 젊은이들이 그냥 입장시켜 주었다. 벌써 텐트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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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천막은 겉에서 보기보다 안에 들어가 보니까 훨씬 더 컸다. 봉사자들과 수사들로 구성된 의용 소방대원들이 안전을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하고 있었다. (오틸리엔 수도원의 소방대원들은 인근에 불이 나거나 도로에 사고가 발생하면 즉각 출동이다. 기도 중에도... 그래서 늘 삐삐를 휴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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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에 서커스가 열렸으니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구경온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서커스 이외에 주변에 먹을 것과 여러가지 놀이 기구, 축제 때 재미삼아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작은 점포들이나 부스들은 모두 오틸리엔 수도원 안에 있는 김나지움 학생들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어~ 다 학생들이네' 하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서커스를 보면서 더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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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는 겉에서 보기보다 안에 들어와 보니 더 멋있었다. 음향과 조명시설이 되어 있었고, 관람석이 경사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 서커스는 프로들이 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김나지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준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하지는 않고, 3-4년에 한번씩 한다고 한다. 2시간 넘게 진행되는 서커스에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5,6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로 부터, 곧 대학생이 될 학생들까지 골고루 출연을 하였다.

나오는 팀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고 연습도 많이 한 것 같았다. 선 보이는 재주가 하루 아침에 익힐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습을 해야만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난이도를 봐도 간단한 묘기에서 부터 고공 줄 타기까지 서커스 무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공연이었다.    

  정말 수사들의 말처럼, 재미있다는 표현이 맞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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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음향, 소품 준비, 무대 보조, 진행, 음악 연주 등 공연에 관계된 거의 모든 것들을 학생들이 스스로 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뒤에서 학생들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고 계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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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학년 학생들의 외바퀴 자전거 타기 묘기. 이 밖에도 초등학생들이 입에서 불을 뿜는 묘기를 한다거나, 기계체조를 응용한 묘기들, 동물을 이용한 묘기들, 물건들을 이용한 음악 연주 등등 무엇보다 창의력 있는 공연을 한 것이 훌륭했다.

공연 중간에 어린 학생들은 이 곳 바바리아 지방의 복장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고학년 여학생들은 치어리더와 같은 율동도 선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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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년 학생들의 고공 줄타기 묘기. 이 학생들은 이 공연을 위해서 전문 지도자를 통해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두 여학생과 남학생 한 사람이 고공 공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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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갑자기 곰과 바이올린 악사가 출연했다. 무대 주변의 꼬마들은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곰이 등장하니까 더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이었다. 그 주인공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예레미아스 총아빠스님과 유기서원자인 오토 수사였다. 이날 이외에도 다른 날에 몇 차례 같은 공연을 선보였다. 아마 총아빠스님은 치르꾸스가 열릴 때 마다 특별 출연(아니 고정 출연!)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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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틸리엔 수도원의 청원자, 수련자 수사들의  특별 공연. 한 덩치하는 5명의 수사들이 출연하여 재미 있는 꽁트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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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휴식 시간. 밖에는 여러가지 놀이 기구가 있어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중국 신부들도 신이 났다. 현재 오틸리엔 수도원에는 앞으로 중국에 베네딕도회를 설립할 것을 목표로 8명의 신부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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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 하루 2-4차례씩 공연을 하였다. 매번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여러가지 행사들과 기도 모임들이 조직되었다. 마지막 이틀 동안은 저녁에 록 콘서트를 하기도 했다. 노트켈 수석 아빠스의 공연도 바로 이 마지막 날 저녁에 있었던 공연의 일부였다.

준비를 위해 수도원에서 많은 돈을 지원하지만, 결코 금전적으로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입장료 등). 오히려 이런 계기를 통해 지역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무형의 자산으로 따진다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7월은 오틸리엔 수도원 안에서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역 공동체학교수도원이 어떻게 협력해야 하며, 어떻게 더 풍성하게 나눌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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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수도원 안에 아침 미사 때 마다 근 30명의 신부들이 공동 집전을 한다. 오틸리엔 수도원의 신부들과 수도자들, 중국인 신부들, 로마에서 독일말을 배우러 온 신부들, 휴가 기간 동안 방문한 교구 신부들과 수도자들, 선교 파견된 수도자들이 휴가 기간 동안 방문한 경우 등등  

공동체 안팎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공동체가 귀챦아 하거나 수도생활의 리듬이 깨어진다고 불평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끼고 수도원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자랑스러워하고...  그리고 너무 일상적인 일들이라서, 준비하는데 많은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요즘 다른 수도원들과 다르게 오틸리엔 수도원에 젊은 지원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수석 아빠스의 록 콘서트 연주



전날 저녁 식사를 하고 이 곳 형제들과 수도원 주위를 산책하고 있는데, 지난 번 베네딕도 축제를 하던 큰 건물이 뭔가 행사 준비를 한다고 분주하였다. 그리고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벌써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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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건물은 농기구를 넣는 창고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이었다. 안에는 벌써 록 콘서트를 위한 조명 장치와 음향 장치들이 완전히 셋팅되어 있었다.
 
끝기도 후에 구경!!을 갔다. 지금 수도원 한쪽 귀퉁이에서 열흘 동안 열리고 있는 '치르꾸스'(서커스) 에도 수도자들은 무료로 입장했다. 그리고 록 콘스트도 무료로 입장을 했다. 두 행사 모두 수도원에서 주관해서 열리고 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들을 즐기기 위해 오기 때문에 적자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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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노트켈 수석 아빠스'였다. 이 곳 오틸리엔 수도원의 총아빠스(archi abbas)를 오랫동안 역임하시고, 현재는 전 세계 베네딕도회를 대표하는 '수석 아빠스'(Abbas Primas)로 선출되어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에서 지내시고 계신다. 교황님과도 친분이 많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록 콘서트에 7,80대 되신 할머니들도 대거 몰려와서 손뼉치며 관람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역시나 이 날의 주인공은 수석 아빠스님이셨다. 1시간 정도 록 그룹의 공연이 끝나고, 새로운 팀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 주인공이 등장했다 ㅎㅎ

그리고 플룻과 전자 기타 연주로 관중들을 열광시킨 후 퇴장하셨다.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밤 11시 30분 경 다시 등장하셔서, 사람들의 마지막 아쉬움까지 다 해소시킨 후 록 콘서트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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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 중간에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말씀하시며 도움을 부탁하셨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수석 아빠스의 열렬 팬들인 할머니들이 오틸리엔 수도원과 전 세계 베네딕도회의 선교활동을 후원하는 은인들인 셈이다. 가족들과 함께 온 젊은이들도 자연스럽게 수도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수석 아빠스님의 록 콘서트 연주를 보았다^^* 자신의 재능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라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네딕도 축일 미사후
베네딕도 축일 미사 후 '젊은이들을 위한 금요 기도모임'팀들의 찬송. 아프리카 노래.
행사에 대한 다른 내용들은 준비중^^*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서의 부활 성삼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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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성당 안에 '프란치스코 로마나' 성녀의 경당이 있다. 그 제대 앞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조각상이 항상 모셔져 있었다. 성 금요일 저녁에는 이 상을 제대 앞에 모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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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성 금요일 밤. 제대 앞에 흰 천을 걸친 십자가와 예수님 상을 모셔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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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요일. 부활 성야 미사의 부활 초 축복.
성당 앞 마당에 불을 아주 크게 피워놓았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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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아빠스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미켈란젤로 아빠스님. 수도원에서 몇 개의 본당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아빠스님들을 Abbas Nullius (이태리말 : abate territoriale)라고 한다. 관할 지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관 수도원의 아빠스님 역시 Abbas Nullius 이시다. 그 관할 지역은 북한에 있는 옛 덕원 수도원 지역이다.

이러한 '자치 수도원구'는 작은 교구와도 같은데, 사진 중간에 계시는 분이 그 교구의 총대리를 맡고 계시는 신부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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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 미사 말미에 계란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봉헌한 빵도 축복한 다음에 신자들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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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살아 있는 '어린 양'을 바구니에 담아서 봉헌하고 축복하였다. 그 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성당 한 쪽에 둔 어린 양이 울어 대는 통에 수도자들이 서로 마주보고 웃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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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대축일 미사 전 행렬.

수도원은 네모 나게 회랑이 있고, 그 회랑의 벽에는 성 베네딕도의 생애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었다. 장엄하게 행렬할 때는, 제의방에서 출발하여 이 회랑을 한 바퀴 돌고 성당으로 입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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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아빠스님께 허락을 청했다. 흔쾌히 승락을 해 주셨다. 그리고 원장 신부님과 다른 형제들에게도 휴게 시간에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신부님은 부활절에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방문하시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셨다. 찍은 모든 사진은 휴게실에 있는 공동 컴퓨터 속에 넣어 두었다. 흰색 수도자들(몬떼 올리베또의) 사이에서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이 방문한 신자들에게도 낯선 광경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뜻한 환대를 베풀어 준 몬떼 올리베또의 형제들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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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여기 저기~~ (토스카나)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 내부 사진들을 몇장 올려 본다. 이 곳 수도원 방문 소감은 수도원 발행 잡지 [분도 芬道] 여름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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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중심인 제대. 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형제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아담하게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젊은 형제들이 많아서인지 성가 소리는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수도자들의 기도석인 '코러스'(가대)는 제대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미사 이외의 모든 기도는 코러스에서 거행하였다.

외국에 와서는 기도석에 무릎을 꿇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체형이 서양 사람들 그것과 달라서인지, 정강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높이와 딱딱하기가 왜관의 장궤틀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왜관 수도원에 있던 내 체형에 딱 맞는 기도석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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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밤에 찍은 사진이다.

제대 앞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모습을 묘사한 전신상을 갖다 놓았다. 뻬루쟈(Perugia)에서 이태리말을 배울 때 보니까, 성 금요일 밤에 신자들이 이 상을 모시고, 골목 구석 구석을 돌며 수난 예식을 하였다. 신자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메고 가고, 중간 중간에 멈춰서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였다.

이 수도원에서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 날 밤에 비가 무지 무지하게 내렸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연세 드신 수도자들을 제외한 모든 수도자들이, 저녁 식사 후에 인근 교구에서 있었던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석하였다.

끝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에 도착하니까, 연세 드신 수사님 몇 분이 개별적으로 기도를 하고 계시고, 다른 분들은 오지 않았다. 물어보니, 다른 곳에서 하는 십자가의 길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이 분들과 함께 TV방에서, 로마의 꼴로세오(꼴로세움)에서 교황님과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보았다. 로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십자가 옆에 휏불을 들고 있는 남녀 한 쌍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꼬박 비를 맞고 있었다.

교황님과 성가대는 텐트 안에서 기도를 바쳤는데, 텐트에 고인 물이 연신 떨어지는 것이 텔레비젼에 비쳤다. 신자들은 추운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꼴로세오 주위에서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올해 꼴로세오에서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중국 교회가 많이 부각되었다...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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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진 수도원 복도.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벽화에 옮겨 놓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그림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왜관에 있을 때, 수도원에서 보았던 책 속의 많은 그림들이, 이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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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성인이 수비아꼬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계실 때, 로마누스가 절벽 위에서 음식을 내려 주는 장면.

이곳에 그려진 모든 벽화에는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고 있다. 올리베따노 수도자들이 흰색 수도복을 입기 때문인 것 같다(white mo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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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건물은 성당과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건물이다. 오른쪽 건물은 일반 신자들이 방문하여 머물 수 있는 건물이고, 기념품 가게도 있다. 엽서나 사진, 책들, 수도원에서 만든 포도주, 전통의 비법으로 제조된 화장품이나 비누 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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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식당.
넓고, 많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떤 수도원에 가 보면, 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일부러 밥 맛이(빵 맛인가?!!) 떨어지는 그림을 식당 벽과 천장에 그려 놓은 경우가 있다!!~~ 여기는 그렇지는 않았다.  

식사 때는 침묵을 지키고 독서를 들었다. 성 금요일에는 아빠스님께서 직접 식사 중에 독서를 읽으셨다.

음식이 나올 때 마다 여러 형제들이 봉사를 하여 음식을 분배하였다. 단 주의 사항!!  한번 지나 간 음식 접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서는 음식 접시를 두 번 돌린다. 부족하면 더 덜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남은 음식은 바로 주방으로 직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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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 놓을 수 없는 곳.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원의 포도주 저장 창고.

5,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내 키보다 더 큰 포도주 통들이 지하실 양 옆으로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이 통들이 오래 되어서 여기에 포도주를 저장하지는 않고, 다른 곳에서 제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 반경 몇 십 킬로 이내에 유명한 포도주 산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가장 유명한 토스카나의 끼안티 포도주, 몬떼풀챠노, 몬딸치노 ...

 


아름다운 토스카나와 몬떼 올리베또 가는 길
    한국에는 두 곳에 남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다. 한 곳은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http://osb.or.kr )이고, 다른 한 곳은 경남 고성군에 있는 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http://osb.brothers.or.kr) 이다.  

    왜관 수도원독일 뮌헨 근처의 샹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에 의하여 한국에 세워졌고, 고성 수도원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또(Monte Oliveto Maggiore) 수도원을 총원으로 하고 있다.
 
    베네딕도회는 자치적인 성격이 강한 수도회라서, 지역이나 설립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연합회로 나뉘어진다. 왜관 수도원과 고성 수도원은 같은 베네딕도회이지만, 다른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인 셈이다.


이태리에 머무는 동안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성주간 동안에 방문하게 되었다. 성주간에 로마에 머물러야 하나, 다른 곳을 방문할까 고민하다가 성주간 1주일 전에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의 아빠스님께 메일을 드렸다.
 
"가도 될까요?"  다음날 아침에 바로 팩스로 답이 날아왔다. "당연히 와도 되지!!" 그리고 오는 방법까지 팩스 용지에 가득 적어 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18년 동안 수도원장직을 수행하고 계신 아빠스님은, 내가 다니고 있는 라떼란 대학교에서 사목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무척 활기 있고 친근감 있게 맞아주셨다.

의정부 교구 신부님 한 분과 함께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아쉬아노(Asciano)역. 도착해서 전화를 하면 수사님이 마중을 나오신다고 했다. 중간에 Chiusi 에서 시에나 행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기차편이 많지 않은 노선이라서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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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로 계속 가면, 가타리나 성녀로 유명한 '시에나'가 나온다. 그리 멀지 않은 듯.

기차 철길 옆으로는 넓은 밭들과 벌판이 펼쳐져 있고, 먼 산의 구릉에는 새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냥 느낄 수 있는 풍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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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iano 라는 동네는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기차 역이 두 개나 있었다. 역 이름이 Asciano Monte Oliveto Maggiore 였다. 수도원 이름을 딴 역이었다.

이런 것 까지 미처 알지 못한 우리는 다른 역에서 내려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근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우리를 태우러 테오도로 수사가 나왔다. 다른 역에 갔다가, 필시 잘못 내렸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정말 이 작은 촌 동네에 역이 두 개나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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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봄이라 풀이 자라기 시작한 구릉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달렸다. '야!!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경치에 취해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은 돌아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테오도로 수사가 중간 중간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차를 세워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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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날은 이렇게 날씨가 좋았는데, 그 다음 부터 성주간 내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계속 내리고, 먼 산 높은 곳에는 눈도 보이고... 무척 추운 성주간을 보냈다. 해발 500 미터에 있는 수도원의 방은 정말 추웠다!!  간간이 스팀이 돌긴 했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 날에는 아빠스님이 며칠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우리를 위해, 옆 동네에 미사를 하러 가시면서 우리를 태우고 가셨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중세의 성곽 도시를 둘러 보라고 하셨다. 그 때 3,40분 동안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미사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날씨가 악화되더니만, 우박까지 퍼붓기 시작하였다.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을 다녀 오는데 이런 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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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usure 라는 중세 성곽 도시에서 내려다 본 풍경. 멀리 구릉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곳은 인근에 시에나피렌체라는 강력한 도시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배하에 늘 있었다. 중세로 부터, 이들 도시간의 경계 지점에 있는 성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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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usure는 다른 곳 보다 높은 곳이라서 주변 경치가 좋았고, 자그마한 도시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 수도원도 보였다.

수도원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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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과 조금 떨어져 있지만, 수도원 들어가는 길목에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고, 주차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지만, 예전에는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마 유사시에는 다리를 들어 올리고 접근을 차단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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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안 쪽에서 바깥으로 바라 본 장면>> 

성문을 통과하여, 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 수도원 입구에 일반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안내문이 영어, 독일어 등으로도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머무는 것 같았다. 그 집에 딸린 수도원 기념품점도 있었다.

오랫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인 만큼(1313 년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수도생활 시작) 수도원 내부에 볼거리도 많았고, 수도자들의 기도도 아름다웠다.  늘 수도원 앞에는 내부 관람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 기념품점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기 위해 오는지는, 개봉 박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작성할 예정임.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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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논할마 수도원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렸다. 인근의 큰 도시가 '죌'(Gyòr)인데, 기차로 빈(비엔나)까지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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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수도원 설립 1000주년(996-1996)을 기념해서 추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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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었던 성 마르띠노의 동상. 판논할마 수도원이 있던 언덕은 오랫동안 '성 마르띠노의 언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헝가리에는 일찍부터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온천이 많아서 휴양 도시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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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들어가는 정문. 수도원 안에는 남자 고등학교와 기숙사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수도원에는 이 학교 출신의 수도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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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식 성당은 작지만 아주 아담하였다. 30여명의 수도자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도원 곳곳에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었고, 잘 보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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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과 25일의 모든 성탄 전례는 Eger에 있는 라디오 방송에 의해 생중계되었다. 사진 왼쪽 중간 부분에 있는 사람이 담당 방송국 직원 인데, 역시 수도원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이 분(오틸라 Atila)에게 부탁했더니, 녹음된 파일들을 모두 복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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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성 베네딕도 경당. 이 곳은 비교적 최근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18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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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는 밤 늦게 도착했는데, 수도원에 가까워지자 상상하지 못한 장관이 펼쳐졌다. 수도원 아랫 마을의 불빛들이 넓게 밑바탕을 그리고 있었다면, 언덕위에 우뚝 솟은 수도원은 아름다운 조명이 낮게 깔린 구름과 어울어져 마치 상상속의 성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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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중앙 계단. 많은 미술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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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복도. 특이한 것은 복도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 추운 날씨 때문에 보온을 위해서 그랬는지, 소음을 막기 위해 그랬는지 모르겠다.

오랫 동안 증축된 건물이라서 복도가 몇 차례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연결되고, 비밀 통로와 같은 계단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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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손님을 위한 방. 특이한 것은 침대 밑바닥이 아주 쉽게 들려졌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침구들과 수건 같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의 식당과 친교의 모임

판논할마 수도원의 식당은, 처음 들어서는 순간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그림들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단식하실 때 사탄의 유혹을 받던 장면이나, 잔치 중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어서 오는 장면들과 같이, 수도자들이 식사를 하면서도 과식을 하지 못하도록 다소 밥맛(!!) 떨어지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농담인지, 실제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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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저녁 만찬을 준비한다고 오후 부터 아주머니와 주방 담당 수사님이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식당의 모습과 배치는 200년 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도원을 구경하다 보니, 200년 전의 식당 그림이 있었는데, 지금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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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전기불을 켜지 않고,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한다고 한다. 24일 저녁 식사. 푸른 나무 가지도 꺾어와서 식탁을 장식해 놓았다.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는 사과에 꽂아 놓은 것이다. 사과가 촛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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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취향은, 중앙 아시아를 누비던 흉노족(!! Hun)의 후예들 답게, 우리와 아주 비슷한 것 같았다. 매운 향료들과 돼지 기름 같은 것들을 많이 사용하고, 마늘과 양파 같은 것도 날로 먹었다. 저녁 식사에는 우리 나라 국수와 거의 유사한 음식을 항상 먹고, 그 다음에 다른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저녁 식사 때 마다 국수에 고추와 마늘 다대기를 덤뿍 넣어서 먹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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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에, 휴게실에서 성탄 축하 친교의 모임을 가졌다. 옥상 아래에 있는 방이라서 아주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빠스님이 오시더니 창문 밖을 보라고 하시길래 보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오랫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헝가리에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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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트리는 수련자들이 별 장식을 달거나, 과자를 묶어서 가지에 달아 장식을 하였다.
 
주위에는 수도자들이 각자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가져다 놓았다. 여기 형제들에 이끌려 성탄 트리 앞으로 갔더니만, 우리를 위한 선물도 나무 앞에 놓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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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모임이 무르익어 가자, 노인 수사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헝가리의 성탄 노래들이 조용히 합창으로 들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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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모두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아빠스님과 수련자가 성탄 트리에 있는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을 내며 타들어가는 폭죽(?)도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아기 예수님 탄생을 맞이하였다.





판논할마 수도원의 도서관
996년에 세워져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 답게, 아름다운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고서적들로, 약 40만권 가량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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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입구 양쪽으로도 십자가 형으로 공간이 있어서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지구본에는 한반도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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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다른 한 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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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해 준 '야코' 수사.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였다.

사진 중앙 부분에 있는 문이 도서관 입구인데, 그 위쪽으로는 천장의 빛이 잘 들어오도록 태양 광선의 각도를 고려한 거울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채광을 용이하게 하고 있었다.

바닥은 돌로 잘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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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천정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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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과 별도로, 수사들이 잡지를 보거나 사전을 참고하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수사들이 거주하는 방 가까이에 있고, 많은 잡지들과, 각 수도원들의 소식지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12월 24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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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Pannonhalma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성탄 전야 독서의 기도
http://www.bences.hu/


* 수도원의 성탄 전례는 헝가리 동쪽을 커버하는 가톨릭 라디오 방송에 의해 생중계 되었다.


 

Vigilia01.mp3

성탄 전야 -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성당 입장 오르간 반주 및 초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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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gilia02.mp3
성탄 전야 - 성무일도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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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gilia03.mp3

성탄 전야 -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제 1독서 - 이사야서



* 왜관 수도원과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는데, 다른 점은 한 분이 다 하지 않고, 몇 분이 분담해서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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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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