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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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해당하는 글(2)
2008.06.02   오도환 오도 아빠스님 서품 금경축(50년) - 2008.7.6.
2008.02.26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오도환 오도 아빠스님 서품 금경축(50년) - 20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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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서품 금경축 상본>>


이틀 전에 독일에 계신 오도 아빠스님으로 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현재의 근황과 함께 7월 6일에 서품 금경축(50년)을 맞이하신다는 말씀과 기념 상본도 들어 있었다.

아빠스님의 일생은 전적으로 선교하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빠스님의 편지에 의하면, 젊은 시절 선교 잡지를 읽었을 때 사제를 필요로 하는 선교지의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일할 부르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항상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파견되었다.


1958년 7월 6일 다른 다섯 분의 수도자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중에 네 분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아빠스님과 다른 한 분은 한국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기념 상본에 나와 있는 내용과 아빠스님의 약력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1958. 7. 6. 사제 서품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소속)
1960.        한국으로 선교 파견

1964. 4. 28.  왜관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선출
1964. 5. 20.  아빠스로 축성 (예전 사진에 보면, 현 순심 남자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거창한 축성식이 있었다~~)

1971. 2. 24.  수도원장 사임
1972-1982    일본에서 선교사 생활
1982-2002    필리핀 디고스 수도원에서 선교사 생활 (수도원 원장으로 봉사; 7월 13일이 디고스 수도원의 설립 은경축 1983-2008)

2002-2007    인도와 중국의 수도원에 대한 지원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오심
2005-2008    로마 성 밖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파견 (베네딕도회 수도원-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

2008            독일에서 무릎 수술
2008. 7. 17.   대만에 있는 수녀원 지도 신부로 파견 예정 (편지에 의하면, 아마도 마지막 소임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대만에서도 하느님의 뜻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mission을 잘 수행하시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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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서품 금경축 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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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에 돌아오셨을 때, 대구 칠곡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한국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았다. 그때만 해도 남은 여생을 한국에서 지내시는구나 생각했었는데, 2005년 1월에 다시 로마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파견되셨다. 그 곳에서 다양한 언어로 고해 성사를 집전하시며 수도원 일을 도우셨다. 한국 수녀님들도 성사를 보기 위해 많이 방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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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한국 주교단이 사도좌 정기 방문(Ad limina)을 하셨을 때,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한국 유학 사제단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아빠스님은 주교님들을 맞이하여 전례 준비와 수도원 안내 등을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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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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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왜관 식구들의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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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2월 로마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시기 전에 성 바오로 수도원을 방문하여 뵈올 기회가 있었다. 수도원 이곳 저곳을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여기는 수도원의 식당인데, 영국 여왕이 수도원에 기증한 샹델리에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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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내부의 아빠스님 개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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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에 붙여져 있던 그림- 문패>>

어떤 중국 신부님이 그려 주었다고 한다.
아빠스님의 한국명 '오도환' 과 독일명 '오도 하아스'(Odo Haas)가 잘 표현되었다.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왜관 수도원은 2009년에 백주년을 맞이한다(1909-2009).
 
1909년 독일 뮌헨 인근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Sankt Ottilien)의 수도자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시작된 것이 마치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한국 전쟁의 와중에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하느님의 섭리는 수도자 공동체와 늘 함께 하셨다.

북한 땅에서 피를 흘리신 수도원 장상과 수도자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은인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했던 많은 수도자들과 은인들...

달력의 첫 장에 적힌 것 처럼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며" 라는 문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1.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를 파견한 분

2.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 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3.        백화동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설립자

4.        김영근 베다 신부 - 피난공동체 장상

5.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설립자

6.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신부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7.        백오리 비뚜스 수사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수사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8.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 덕원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9.        스위스 캄 올리베따노 수녀회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 연길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10.     오병주 요셉 선생 – 덕원,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 협력자

11.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 은인(피난공동체를 도우신 분)

12.     임정업 마리아 여사 – 은인(왜관 수도원 성당 봉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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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1870
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95년 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 달 뒤에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897년 첫 서원을 했다. 1902년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국에 진출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순방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 받았고, 어려운 수도원 사정에도 불구하고, 1908년 선교사를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방문 중에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해 독일로 가져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금강산이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한국문화를 유럽에 알렸다. 1931년 총아빠스직을 사임하고 동아프리카 페라미호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564 3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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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87
년 독일 풀다 교구 오베루프 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08년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 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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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동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1889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오토보이렌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교육, 출판, 자선사업을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1950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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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베다 신부

191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고 1943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9년 덕원 수도수도 폐쇄될 때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로부터 장상권을 위임 받은 노 안셀모 신부가 당시 차부제였던 김 베다 신부를 한국인 수사들에 대한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교회와 연합회에 덕원 수도원 상황을 알렸고,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새로 꾸려진 피난 공동체의 생계와 영성을 책임지며 1952년 장상으로 임명된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실질적인 장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사목과 피정집 책임, 분원장, 수녀원 지도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김 베다 신부는 강론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02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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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1905
년 스위스 바셀 교구 로어에서 태어났다. 1927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군데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수를 맡기도 하였다. 1947년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불안한 한국 내 정치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하여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로부터 한국 공동체를 책임자로 임명되어,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에 마련한 새 정착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기틀을 잡았다. 같은 해 함흥 및 덕원 교구장 서리로 임명 받았고, 1953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1954년에는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몬시뇰 칭호를 부여 받았다. 1964년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원장직을 사임하였고 199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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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1907
년 독일 쾰른 교구 니더카셀에서 출생하였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고 1929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34년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말을 배우는 동안에는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후에 여러 군데 본당에 나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1949년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가 1956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왜관 감목대리구 소속 여러 본당에서 선교하였으며, 수녀원 지도 신부로 있었다. 또한 73세의 나이로 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탕하고 곧은 성격이었으나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언제나 어깨춤을 들썩여 좌중을 흥겹게 했다. 200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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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리 비뚜스 수사


1908
년 독일 뷔르쯔부륵 교구 미헬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7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39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 되었다. 수도원에서 오리 키우는 일을 해서 오리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제본 장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다른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1959년에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오랫동안 인쇄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외원 사무를 보다가 은퇴하였다. 한결 같은 노동과 기도의 삶으로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젊은 형제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천수를 누리다 2003년에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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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수녀원


1925
년 당시 원산 대목구장이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초청으로 독일 툿찡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원산으로 파견되었다. 툿찡 수녀원은 오틸리엔 수도원과 더불어 1885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선교 베네딕도회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남녀 두 수도공동체를 창설하였는데 두 공동체가 협력하여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1927년 원산 분원이 자립수녀원으로 승격되었고 수녀들은 덕원 수도원이 펼치고 있던 선교 활동인 본당사목, 교육사업에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도 병원, 시약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회와 지역 주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되자 남한으로 피난해온 수녀들이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 오늘날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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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스위스 죽
(Zug)주에 위치한 캄 수녀원은 연길 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31 9 14 6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다. 1945년까지 모두 7개의 본당에 지원을 설립하면서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사업을 동반하였다. 1946년 수녀원을 폐쇄되고, 1951년 모든 서양 수녀들이 중국을 떠났다. 한국인 수녀들은 1947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와 경기도 소사에서 공동체를 꾸렸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에서 수련소를 다시 열었고, 1955년에 연길 수녀원이 폐쇄된 후 첫 종신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동체가 성장해 오늘날 한국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회가 되었는데 부산 광안리에 본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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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요셉 선생


1890
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숭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울 백동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원산 해성 학교를 비롯하여 덕원, 고원, 신고산 등 각지에 본당 11개소, 학교 10개소를 설립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1940년부터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비서직로 일했고, 독일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부터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당시 원산이 회복되었을 때 UN군의 도움으로 원산 가톨릭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성주에 정착했고 17년간 성주 본당 회장으로 있으면서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에 협력하였다. 1969년 교회와 수도원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12 25에 선종하여 평신도로서는 유일하게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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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6.25
전쟁이 발발하고, 헤어져 있던 덕원 수도원 수사들이 부산 중앙성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8명의 수사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여기에는 연길과 함흥 교구 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맥카아티 신부는 아메리카 카시노 연합회 소속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의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어렵게 피난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맥카아티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와 여러 모로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맥카아티 신부의 주선으로 공동체는 1951년에 대구 교구 주교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 할 때까지 공동체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간 맥카아티 신부는 1963년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2000 2 5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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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업 마리아 여사


1951
년 대구에서 돌아가신 덕원 수도원 출신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서모이다. 홍콩으로 이민 가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재산을 모았는데 평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동호 쁠라치도 아빠스가 연합회 일을 보러 유럽을 왕래하다가 홍콩을 경유하곤 하였는데 그때 여사를 만났고 왜관 수도원에 새로운 성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자신이 애써 모았던 재산을 봉헌하여 성당 신축비용 대부분을 대었다. 1975년 수도원 성당이 완공되면서 성당 출입구 벽면에 기념 표석을 새겨 그분의 장한 뜻을 기렸고, 1976년 수도원 측에서는 교황 강복장을 전달하였다. 198857에 선종하였고 그분의 원의에 따라 수도원 묘지 곁에 안장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 (190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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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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