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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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 자리'에 해당하는 글(3)
2010.01.13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정 70주년(2010.1.12.)
2008.03.27   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 울릉도 중개척기를 노래한 가사 작품(1906)
2008.02.26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정 70주년(2010.1.12.)
작년 2009년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1909-2009)이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처음 한국에 도착해서 설립한 서울 수도원은 백동, 현 혜화동 서울가톨릭신학교 자리였다. 작년 왜관수도원에서는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백동수도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수도원 계간지 '분도' 겨울호(2009) 뒷표지에 표지석 사진이 실려 있다. 

백동수도원 표지석


"백동 수도원 터 - 1909년 성 베네딕도의 제자들이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초청으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해 가을 이곳 동소문 안 백동에 한국가톨릭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숭공 기술학교와 숭신 사범학교를 열어 복음전파와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서 살아온 그분들의 헌신을 기리며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 진출 백주년을 기념하여 여기에 빗돌을 세운다. - 2009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축일에 성 베네딕회 왜관수도원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100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수도 공동체에게 밀려왔던 일련의 수 많은 시련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왜관수도원 본원에서는 2009년 마감을 며칠 앞두고(12.28)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북한 지역에서 순교하신 38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예비심사법정을 개정하였다. 이분들이 복자와 성인으로 선포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첫 시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신문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겠다.


오늘 한국주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오늘이 북한에 있는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 설립 7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1940년 1월 12일 원산 대목구에서 분할). 침묵의 교회라 불리는 곳이지만 앞으로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애쓰고 계신다. 

평화신문(2009.08.23.)에 덕원 면속구(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함흥 교구) 설정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연속성 안에서 살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현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 울릉도 중개척기를 노래한 가사 작품(1906)
* 증조부님의 가사 작품 


저의 조부께서 울릉도에 들어 오셔서(1894년), 1906년 지으신 가사 작품인데, 경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서원섭 교수님께서 울릉도에 오셔서 채록하시고, 논문으로 발표하신 내용입니다. 조부님 작품의 음수률을 송강 정철의 것과 비교하면서 그 우수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박순진(朴淳鎭)의 子 박팔수(朴八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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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인터넷 '파란'과 '파스'의 백과사전에서)

1906년 박시옹이 울릉도 개척 때의 생활상과 풍물을 소재로 지은 가사. 1878년의 울릉도 개척령 뒤 울릉도 중개척기에 해당하는 1894년 울릉도에 들어간 지은이가 그곳에서 두 아들을 얻은 뒤 지은 것이다. 장남 순진(淳鎭)의 집에서 발굴 당시 작품의 제명(題名)이 없는 것을 발굴자 서원섭(徐元燮)이 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으로 혼란한 중에 고향을 떠나 울릉도에 입도하는 지은이의 심정과 항해 과정, 개척민들의 어려운 생활과 상부상조, 일본과의 물물교환, 뛰어난 자연풍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간결한 문체와 정연한 형식을 갖춘 비교적 짧은 작품이지만 《정처사술회가(鄭處士述懷歌)》와 함께 울릉도 개척기의 정황을 표현한 희귀한 작품이다. 섬을 소재로 한 작품이 드문 가사문학에서 한국 3대 도서의 하나인 울릉도를 소재로 지은 작품이라는 데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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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서원섭, “울도선경가고”, [논문집] 13, 경북대, 1969.

1, 머리말

여기 소개 발표하는 가사는 필자가 1967년 여름에 울릉도 민요(1)를 수집키 위해서 들어 갔을 때 얻은 것이다. 민요 뿐만 아니라 국문학과 관계되는 자료는 다 모아 보겠다는 것이 필자이 욕심이고 보매, 가는 곳마다 이 방면 자료를 수소문하던 차 서면 통구미에서 정처사(鄭處士) 술회가(述懷歌)(2)를 얻은데 힘입어 안내하는 동장
박귀수(朴龜洙) 에게 가사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 없는가고 물었더니 자기 할아버지가 중개척(中開拓) 때에 들어와서 지은 가사가 있는데 , 이를 10여년 전에 자신이 베낀 필사(筆寫)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얻어 보니 간결한 문체에 그 형식이 너무나 잘 다듬어져 있기에 원본을 구하기를 원했더니 씨의 큰집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 형님에게 연락을 해 주겠다고 했다. 십여일 후에 천부동(天府洞) 에 가서
박영수(朴永洙) 씨를 찾아 갔더니 동생에게 연락을 받았다면서 다음날 본천부동(本天府洞) 에 계시는 부친댁에 안내하겠다고 한다.

이튿날 본집에 가니
박순진(朴淳鎭) 옹의 말씀이 원본은 잃어버린지 오래라고 하시면서 내보이는 가사를 읽어 보고서는 약간의 오사(誤寫) 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잘못된 곳을 일일이 바로 잡아 주셨다. 여기 발표하는 가사는 박옹의 교정본(敎正本) 임과, 또 원래 이 가사에는 제명(題名)이 없었기 때문에 필자가 울도 선경가(鬱島仙境歌) 라는 이름을 붙였음을 밝혀둔다.

2, 지 은 이

박시옹은 자(字)를 형오(衡五)라 하고, 현복(玄復)공을 아버지로, 이득상(李得祥)의 딸 여주(麗州) 이씨를 어머니로 하여 고종(高宗) 원년 갑자(甲子)(1864.A.D) 음력 7월 2일 울주군 농소면 창평리 송정촌(松亭村)에서 삼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시옹이 태어난 때는 대원군의 집권으로 쇄국정책이 시작되려는 때로 바야흐로 국가다단(國家多端)한 시기였다. 세 살 때인 병인(丙寅)(고종(高宗)3년 1866A.D)에는 천주교도의 학살로 프랑스 함정의 내공(來攻)과 미국 상선 샤만호 사건이 일어났고, 열두 살 때인 을해(乙亥)(고종12년 1875A.D) 8월에는 일본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에서 포격한 사건이 일어나,  이 때문에 그 다음해 강화도에서 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열다섯살 때인
고종15년 (1878A.D)에는 울릉도의 개척령이 있었다.

열아홉 살 때에
임오군란(壬午軍亂)(1882A.D)이 일어나 정국이 극도로 혼탁해지자 이 난세를 피해 울릉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스물 한 살 되는 갑신(甲申)(고종(高宗)21년 1884 A.D)에는 울산 이씨 자중(自中)의 딸과 결혼하여 세 딸을 낳았고, 고종31년 갑오(甲午)(1894A.D) 씨의 나이 서른 한 살 때 동학난이 일어나는 등 세상이 극히 어수선하자 살기 좋다는 울릉도로 들어가 북면 천부동(天府洞)에 자리를 잡고 농사에 힘썼다.

들어간 지 7년 만인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1901 A.D) 에
맏아들 순진(淳鎭)을 낳았고, 5년 뒤인 병오(丙午)(1906 A.D) 1월 27일에 용진(庸鎭)(일명: 재릉(再陵)을 낳았다. 딸만 셋을 낳다가 이 섬에 들어가 맏아들을 보고 이어 막내 아들을 또 낳자 그 기쁨을 가누지 못해서 칠 안에 이 가사를 지었던 것이다. 옹은 1947년 6월 15일 84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3)

[참고]
(1) 이 때 132편의 민요를 채록하여 그 중 일부를 발표한 바 있다. 졸고 울릉도 민요 연구 <어문학 18>1968.
(2) 원래는 초개척 때의 작품인 이 가사를 발표하고 그 다음에 중개척 때 가사인 울도 선경가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한정된 원고의 장수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분량이라 하는 수 없이 다른 학술지에 발표키로 한다.
(3) 밀양 박씨 대헌공파(大憲公派) 세보(世譜)와 지은이의 두 아드님(순진(淳鎭), 용진(庸鎭)옹)의 구술 자료에 의함.



3. 가사 소개

제 1 단

어와 세상(世上) 사람들아 이내말쌈 들어보소
수백다족(數百多族) 송정촌(松亭村)에
(4) 내맴이(5) 생장(生長)하야
부모(父母)에 은덕(恩德)이며 형제(兄弟)간 우애(友愛)로서
명신가절(明新佳節) 좋을때에 남녀노소(男女老少) 함께모아
희희낙낙(喜喜樂樂) 지내나서 백년(百年)을 기약터니

세생(世上)이
(6) 분분(紛紛)튼가 신맹(身命)이(7) 불행(不幸)튼가
삼십(三十)이 계오넘어 가오(甲午)
(8)을미(乙未) 당하였네
동기지정(同氣之情) 다베리고
(9) 울도(鬱島)로 들어온다

이는 본 가사의 서사(緖詞)로서 고향 송정촌에서 부모 친척들의 사랑속에 기쁜 나날을 보내면서 고향 동산에서 백년을 살아 보겠다고 다짐한 것도 잠깐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해지자 신개척지 울릉도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말하고 있다.

[참고]

(4) 울주군 농소면 창평리 송정촌
(5) 내몸이의 잘못,
(6) 세상의 잘못.
(7) 신명의 잘못.
(8) 갑오의 잘못.
(9) 다버리고의 잘못.


제 2 단

만경창파(萬頃滄波) 동해변(東海邊)에 일엽선(一葉船)을 잡아타고
순풍(順風)에 돛을달어 일주야(一晝夜) 달려오니
만학천봉(萬壑千峰) 솟인 것이 이것이 울도(鬱島)로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실고 순풍에 돛을 달고 하루 낮밤을 향해하며 울릉도에 닿았다고 하는 항해 경로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 3 단

주희(周廻)는 일백리(一百里)나(10) 평지(平地)도 전혀없다
산을지고 집을짓고 난글비고 밭을내니
세상(世上)의 별건곤(別乾坤)이 이밖에 또있는가

마맥두태(마麥豆太)
(11)숨아내세(12) 이것을 보맹하고(13)(保命)
깍새를
(14) 잡아다가 이것을 반찬(飯饌)하니
육지(陸地)의 고양진미(膏梁珍味) 생각한들 어이하리


울릉도는 둘레가 겨우 130리가 되는 조그만한 섬인데다가 평지라고는 성인봉(聖人峰) 아래에 옛 분화구의 화구원(火口原)인 면적 50정보의 작은 분지가 있을 뿐 평지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 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감자 보리 콩 등을 심고, 깍새를 잡아 반찬을 하는 등 개척자의 꾿꾿한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
(10) 울릉도는 둘레가 44,21Km 면 적은 72,44Km2 직경이 약 30리의 작은 섬 이다 .
(11) 감자 보리 콩.
(12) 심어 내세의 잘못.
(13) 보명하고의 잘못.
(14) 개척때 이 섬에는 깍새가 많이 있어 이를 잡아 먹었다고 한다 깍새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깍새등(깍새가 많은 등성이란 뜻)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도 알수 있다.

제 4 단

삼동(三冬)을 당하오면 나날이 풍설(風雪)이라
이웃출입(出入) 전혀막고 벌기같이 들어앉아
감자밥 무시국을 욕기복통 대로하니
우습다 우리인생 각색풍상(各色風霜) 다적는다
(15)

겨울이 되면 몇자 가 되리만큼 큰 눈이 쌓여 이웃 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마치 벌 모양으로 들어 앉아 봄날을 기다리며 가만히 생각하니 울릉도까지 들어오게 된 자신이 우습기까지 하다고 하였다.

[참고]
(15) 다 격는다. 다 경험한다.


제 5 단

그럭저럭 지내나서 봄날이 돌아오면
장설(壯雪)이 다녹은후 춘풍(春風)이 화창하다.
집집이 농사짓기 인생(人生)의 직업(職業)이라
호미들고 밭매기며 산에가 나물뜯기
(16)
상부모(上父母} 하처자(下妻子)도 이로서 보맹(保命)하니
(17)
재미로서 지내노니 건고(勤苦)를 피할소냐


봄이 돌아와 날씨가 따뜻하면 쌓였던 눈도 녹고 집집마다 농사에 힘쓰는 한편 산에 가서 나물을 뜯는 고달픈 삶이 계속되지만 이것이 다 처자를 부양하는 것이고 보면 고달픔도 잊을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
(16) 이섬의 특산물 중의 하나가 이 산나물이다 . 전호(前胡) 꼬치미 고사리 명이 삼나물 부지기초(不知饑草) 고비 곤대서리 미역초 땅두릅 등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수 없을 정도로 그 맛이 좋다.
(17) 보명(保命) 하니의 잘못.

제 6 단

대해중(大海中)에 오는배는 일본(日本)으로 들어온다
포백(布白)이며 각색물건(各色物件) 두태(豆太)로서 바꿔내니
이고데 사는사람 의복(衣服)이 글로난다.


개척 후에도 일본 사람들이 내왕하며 베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실고 와서는 이곳에서 나는 콩과 바꾸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제 7 단

갑신년(甲申年)(18) 개척(開拓)후에 천여(千餘)집 되었으니
해중(海中)에 솟은섬이 아매도
(19) 명지(名地)로다
산천(山川)에 있는풀이 약초(藥草)가 반이넘고
지중(地中)에 솟은섬이 물맷도
(20) 기이(奇異)하다
풍토(風土)가 순(順)하기로 인간(人間)에 병(病)이적고
육지(陸地)가 머자하니 인품(人品)도 후(厚)하더라.

고종 21년 갑신정변 의 어수선함을 피해 들어오기 시작한 가구가 이제는 천여집이 넘어 초개척 때의 어려움이란 찾아볼수 없고 산에 있는 풀은 대부분이 약초요, 풍토 기후 인심이 좋고 병이 없는 그야말로 지상낙원(地上樂園)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
(18) 갑신정변(김옥균 난)이 일어난 해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된 듯 하다.
(19) 아마도의 잘못 .
(20) 물맛도의 잘못


제 8 단
술을하야 서로청코 밥을하야 논아먹고
문학(文學)을 숭상(崇尙)하니 촌촌(村村)이 글소리라
팔도(八道)사람 모여들어 한이우지 되었이니
서로추축(追逐)
(21) 하는것이 이것도 연분(緣分)이라

팔도(八道)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 이웃이 되어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 하는 한편 동리마다 서당을 차려 글 읽는 소리가 자자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곳이 Utopia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
(21) 추축(追逐) : 벗 사이에 서로 왕래하여 교제함.


제 9 단

주야(晝夜)이 도는마음 환고향(還故鄕)이 원(願)이로다
풍진(風塵)도 식어지고 국태민안(國泰民安) 하신후에
남녀간(男女間) 키와내어 고향(故鄕)을 찾어가세

편안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어수선한 육지에 두고 온 부모 형제에 대한 생각은 간절한 것이었다. 언젠가 풍진(風塵)도 식어지고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장성한 아들 딸을 거느리고 고향에 가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있다.



4. 내용
본 가사의 내용을 고찰함에는 그 문맥에 따라 편의상 9단으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 내용 부분은 각 단  아래에 배치하여,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치하였다.)


5. 형식

본 가사의 형식을 보면 모두 43절 86구 635자로 짜여져 있는데 그 음수율은 다음과 같다. 3.4조 ― 53개, 4.4조 ― 33개가사의 기본 음수율이 3.4조와 4.4조라고 한다면 이 가사는 그야말로 완벽한 형식(음수율)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오늘날 전하는 가사 중에 그 음수율이 3.4조와 4.4조 만으로 이루어진 가사는 이 가사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사의 형식(음수율)이 얼마나 잘 짜여져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가사 문학의 제 일인자인 송강 정철((送江鄭撤) 의 속미인곡(續美人曲)과 견주어 보기로 하겠다.

작 품

절수

구수

자수

2.3조

2.4조

3.2조

3.3조

3.4조

3.6조

4.3조

4.4조

속미인곡

48

96

670

3

12

1

14

33

1

2

30

울도선경가

43

86

635

53

33


아동지이소(我東之離騷)니. 영중지백설(漏中之白雪)이니. 겁가여공명출사표(可與孔明出師表) 백중간야(伯仲看也)겂니 하며 역대 비평가들로부터 절찬(絶讚)을 받은 바 있는
송강의 속미인곡이 2.3조, 2.4조, 3.2조, 3.3조, 3.6조, 4.3조, 4.4조, 등 8개의 음수율로 이루어 진데 비해서 본 가사는 다만 3.4조와 4.4조의 2개의 음수율 만으로 짜여졌다는 것은 이 가사의 형식(음수율)이 얼마나 우수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6. 맺는말
개척(開拓)된 지 90년도 안되었을 뿐더러 개척이래 지금까지 논밭의 부족으로 바다에만 의존해야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라 이 섬에 노래와 가사를 지어 부를 여유가 없는 탓인지 이러한 류의 작품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초개척기의 가사 정처사술회가(鄭處士述懷歌)와 중개척기의 본 가사를 얻을수 있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이 가사를 살펴 본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가사는 민요와는 달리 섬을 소재로 한 가사들이 별로 없는 중에 우리나라 삼대 도서의 하나인 울릉도를 소재로 해서 지었다는 점에서 크게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이 가사는 광무(光武) 10년(1906.A.D.) 2월 2일 경에 지어진 것이다.

셋째, 본 가사를 9단으로 나누어 살펴본 바 퍽 간결한 문체로 쓰여졌을 뿐 아니라 중개척기의 사정을 잘 그려 놓고 있다.

넷째, 본 가사를 통해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도 일인(日人) 들이 물건들을 바꾸기 위해서 이 섬에 내왕(來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본 가사의 음수율은 3.4조와 4.4조만으로 되어 있다.

여섯째,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과의 음수율의 대비(對比)에서 속미인곡보다, 더 잘 짜여진 가사임을 알았다.





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왜관 수도원은 2009년에 백주년을 맞이한다(1909-2009).
 
1909년 독일 뮌헨 인근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Sankt Ottilien)의 수도자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시작된 것이 마치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한국 전쟁의 와중에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하느님의 섭리는 수도자 공동체와 늘 함께 하셨다.

북한 땅에서 피를 흘리신 수도원 장상과 수도자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은인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했던 많은 수도자들과 은인들...

달력의 첫 장에 적힌 것 처럼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며" 라는 문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1.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를 파견한 분

2.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 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3.        백화동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설립자

4.        김영근 베다 신부 - 피난공동체 장상

5.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설립자

6.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신부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7.        백오리 비뚜스 수사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수사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8.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 덕원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9.        스위스 캄 올리베따노 수녀회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 연길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10.     오병주 요셉 선생 – 덕원,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 협력자

11.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 은인(피난공동체를 도우신 분)

12.     임정업 마리아 여사 – 은인(왜관 수도원 성당 봉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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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1870
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95년 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 달 뒤에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897년 첫 서원을 했다. 1902년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국에 진출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순방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 받았고, 어려운 수도원 사정에도 불구하고, 1908년 선교사를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방문 중에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해 독일로 가져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금강산이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한국문화를 유럽에 알렸다. 1931년 총아빠스직을 사임하고 동아프리카 페라미호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564 3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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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87
년 독일 풀다 교구 오베루프 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08년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 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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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동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1889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오토보이렌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교육, 출판, 자선사업을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1950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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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베다 신부

191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고 1943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9년 덕원 수도수도 폐쇄될 때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로부터 장상권을 위임 받은 노 안셀모 신부가 당시 차부제였던 김 베다 신부를 한국인 수사들에 대한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교회와 연합회에 덕원 수도원 상황을 알렸고,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새로 꾸려진 피난 공동체의 생계와 영성을 책임지며 1952년 장상으로 임명된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실질적인 장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사목과 피정집 책임, 분원장, 수녀원 지도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김 베다 신부는 강론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02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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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1905
년 스위스 바셀 교구 로어에서 태어났다. 1927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군데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수를 맡기도 하였다. 1947년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불안한 한국 내 정치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하여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로부터 한국 공동체를 책임자로 임명되어,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에 마련한 새 정착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기틀을 잡았다. 같은 해 함흥 및 덕원 교구장 서리로 임명 받았고, 1953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1954년에는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몬시뇰 칭호를 부여 받았다. 1964년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원장직을 사임하였고 199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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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1907
년 독일 쾰른 교구 니더카셀에서 출생하였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고 1929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34년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말을 배우는 동안에는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후에 여러 군데 본당에 나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1949년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가 1956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왜관 감목대리구 소속 여러 본당에서 선교하였으며, 수녀원 지도 신부로 있었다. 또한 73세의 나이로 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탕하고 곧은 성격이었으나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언제나 어깨춤을 들썩여 좌중을 흥겹게 했다. 200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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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리 비뚜스 수사


1908
년 독일 뷔르쯔부륵 교구 미헬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7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39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 되었다. 수도원에서 오리 키우는 일을 해서 오리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제본 장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다른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1959년에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오랫동안 인쇄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외원 사무를 보다가 은퇴하였다. 한결 같은 노동과 기도의 삶으로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젊은 형제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천수를 누리다 2003년에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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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수녀원


1925
년 당시 원산 대목구장이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초청으로 독일 툿찡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원산으로 파견되었다. 툿찡 수녀원은 오틸리엔 수도원과 더불어 1885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선교 베네딕도회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남녀 두 수도공동체를 창설하였는데 두 공동체가 협력하여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1927년 원산 분원이 자립수녀원으로 승격되었고 수녀들은 덕원 수도원이 펼치고 있던 선교 활동인 본당사목, 교육사업에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도 병원, 시약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회와 지역 주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되자 남한으로 피난해온 수녀들이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 오늘날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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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스위스 죽
(Zug)주에 위치한 캄 수녀원은 연길 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31 9 14 6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다. 1945년까지 모두 7개의 본당에 지원을 설립하면서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사업을 동반하였다. 1946년 수녀원을 폐쇄되고, 1951년 모든 서양 수녀들이 중국을 떠났다. 한국인 수녀들은 1947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와 경기도 소사에서 공동체를 꾸렸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에서 수련소를 다시 열었고, 1955년에 연길 수녀원이 폐쇄된 후 첫 종신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동체가 성장해 오늘날 한국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회가 되었는데 부산 광안리에 본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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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요셉 선생


1890
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숭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울 백동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원산 해성 학교를 비롯하여 덕원, 고원, 신고산 등 각지에 본당 11개소, 학교 10개소를 설립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1940년부터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비서직로 일했고, 독일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부터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당시 원산이 회복되었을 때 UN군의 도움으로 원산 가톨릭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성주에 정착했고 17년간 성주 본당 회장으로 있으면서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에 협력하였다. 1969년 교회와 수도원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12 25에 선종하여 평신도로서는 유일하게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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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6.25
전쟁이 발발하고, 헤어져 있던 덕원 수도원 수사들이 부산 중앙성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8명의 수사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여기에는 연길과 함흥 교구 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맥카아티 신부는 아메리카 카시노 연합회 소속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의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어렵게 피난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맥카아티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와 여러 모로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맥카아티 신부의 주선으로 공동체는 1951년에 대구 교구 주교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 할 때까지 공동체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간 맥카아티 신부는 1963년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2000 2 5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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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업 마리아 여사


1951
년 대구에서 돌아가신 덕원 수도원 출신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서모이다. 홍콩으로 이민 가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재산을 모았는데 평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동호 쁠라치도 아빠스가 연합회 일을 보러 유럽을 왕래하다가 홍콩을 경유하곤 하였는데 그때 여사를 만났고 왜관 수도원에 새로운 성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자신이 애써 모았던 재산을 봉헌하여 성당 신축비용 대부분을 대었다. 1975년 수도원 성당이 완공되면서 성당 출입구 벽면에 기념 표석을 새겨 그분의 장한 뜻을 기렸고, 1976년 수도원 측에서는 교황 강복장을 전달하였다. 198857에 선종하였고 그분의 원의에 따라 수도원 묘지 곁에 안장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 (190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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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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