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수사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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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 수녀님들의 호소 1
매립지 용도를 변경하여, 조선소를 건설하려는 데에 항의하여, 마산 시청에서 단식을 하던 트라피스트 수녀님들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말도 들리네요.
 
세계 수도자 장상연합회(UISG/USG) 정의 평화 위원회에서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를 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작년에 인근에 위치한, 올리베따노 수도원과 수녀원, 가르멜 수녀원도 이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 KBS 성탄 특집에서도 트라피스트 수녀님들의 생활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봉쇄구역 안에서 침묵과 기도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이들의 소중한 터전이 잘 지켜지기를 소망합니다.  


http://www.sujongtrappist.or.kr/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홈페이지 참조


<<경남 마산시 구산면 수정리 989-1>       북위 35° 06`46.76``N  - 동경 128° 34`38.3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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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리 마을과 트라피스트 수녀원이 처한 긴박한 현실에 대한 호소
(수정만 매립지 조선소 불법 건설 및 심각한 환경오염)



11월5일부터 10일까지 지난 5일 간 일어난 긴박한 사태에 대해 교회와 수도자들께 알리며 기도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1. 사건의 경위

- 1990년 마산시가 경남도청으로부터 매립허가를 받고 두산 건설에 매립 용역을 줌
- 이 단계에서 마을 주민, 마산시, 두산이 매립지를 아파트용 택지로 사용할 것을 계약함. (이때 이미 수정수녀원이 있었으나 이 협의에서 배제되어 주민들이 회사측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난 후 사실을 알게 되었음)

-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STX가 350억을 주고 매립지를 사들여 계속 매립 공사를 진행해왔음.
- 마을 주민들에게 조선업의 부품 물류창고를 건설할 예정이며 아무런 공해도 없다는 사실을 유포함.   15일 전 우리 수녀 7명이 우연히 STX 직원을 만났는데 먼저 인사를 하며 위와 같은 설명을 했음.
- 9월, 10월 두 달 동안 매립지로부터 엄청난 굉음이 지속적으로 들렸으나 공사 중 소음이라고 판단했음

- 11월5일 한 마을 주민으로부터 이 굉음이 공사소음이 아니라 이미 조선업 중의 블록 제조 작업을 이미 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음.
- 마산, 창원 환경 연합에 연락하고 진상 조사를 부탁함.
- 현장 방문으로 불법으로 배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확인.
- 환경 연합, 주민대표와 함께 관련 정부 관청을 직접 방문 확인한 결과

- 택지를 공장으로 용도변경하는 절차를 오래 전부터 밟고 있었음을 확인
- 11월9일 마산시와 STX를 불법 작업과 그 허가에 대해 검찰에 고발함.
- 주민들 몰래 용도변경 절차를 밟으며 주민들에게 발각되기 전까지는 공청회나 조선소 설치에 관한 설명회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 이후 주민들의 요청으로 열린 공청회도 무성의한 설명으로 일관되었으며 환경오염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2. 사태의 긴박성

- 여러 정보에 따르면 11월19일 택지에서 공장으로의 용도변경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예정인데, 용도 변경이 허가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한다.
- 만약 결정이 내리는 기관인 행정심사위원회가 용도변경 불가를 내려도 마산시는 다시 상급 기관에 상소할 수 있으나, 주민과 수녀원은 법적으로 그러한 자격이 없다 한다.


3. 조선소가 있는 다른 지역의 환경 오염 실태

- 진해 죽곡리 대동조선(STX와 오리엔탈 조선) :
  소음, 분진, FRP페인트로 인한 공기오염의 심각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과일나무는 열매가 전부 낙과해버려 수확이 불가능하며, 조개류는 암컷이 하나도 없고, 검은 자동차를 하루만 그대로 세워두면 페인트 분진으로 하얀 구멍같은 무늬가 생겨나며, 현재 70세대 정도 사는 마을에 1년에 2-3명이 암으로 죽어간다고 한다.

또한 거대한 철판을 두드려대는 굉음이 24시간 그치지 않아 불면증과 신경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 마을은 다른 곳으로 이주가 결정되었는데 16년 동안 싸워 이런 결정이 났지만 사실은 3년 전 고속도로 통과가 결정되면서   국가가 훨씬 많은 부분을 보상하고 나머지만 STX 측이 부담한다고 한다.

- 거제도 옥포 등의 조선소도 위와 별반 다름이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 거제도 한내 마을  : 얼마 전 매립 완료되고 조선소가 가동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주민들이 환경단체를 몰아내고 조선소를 환영하였으나 조선소 가동 후 2달만에 환경연합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 거제도 양식업은 점점 더 먼 바다로 옮겨가고 있지만 채취량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4. 수정리 마을의 입지조건과 예상되는 환경 오염

- 수정리는 380세대 1,000명이 넘는 주민이 있는 마을이며 바로 옆에 안녕, 석곡, 등 다른 마을이 연이어 있는 해안지대이고 이런 마을들은 거의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매립지를 중심으로 바로 옆에 중학교, 보건소, 유치원, 초등학교, 면사무소, 우체국이 소재하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 개신교 예배당과 수정수녀원이 위치해 있다.

- 대동조선이나 거제도는 바다를 향해 탁 트여있고, 조류의 흐름이 빨라 그나마 바다 정화가 빠르다고 한다.

- 그런데 수정리 및 주위 마을은 만으로 쑥 들어간 위치에 있어 분진과 소음의 피해는 몇 배가 예상이 되며, 만이기 때문에 조류의 흐름이 늦어 바다 오염도 훨씬 심각하리라는 예상이다.
- 주위는 수려한 경관과 깨끗한 바다 그리고 양식업이 발달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심각한 오염에 처해지리라는 예상이다.


5. 마산시의 입장

바로 옆 창원 공업도시에 비해 특별한 산업이 없는 마산시로서는 얼마 전 한일 합섬의 폐쇄와 더불어 더 심각한 경제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시는 조선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불법이라는 수단도 불사하고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산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수정리 380세대와 주위 여러 마을 그리고 장래의 심각한 환경 오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쇄수도원인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무력함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으며 동네주민과 마창환경연합 쪽의 열성적인 도움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여 교회의 도움과 기도, 실제적인 지원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수정리 낮고 작은 산, 낮고 작은 사람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낮고 작은 산>

우리 집 뒷산에는 화려한 꽃은 없습니다.
진달래, 산복숭아, 자운영, 구절초
철따라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서로 의지하며 피어있을 뿐…

우리 집 뒷산에는 쭉 뻗은 나무들이 늘어선
멋진 산책로는 없습니다.
굽이굽이 돌아
소나무도 만나고 개암나무에도 걸리고
바위틈을 올라 팍팍한 자갈길을 밟아 올라가는 길.

그래서 참 편한 길입니다.
기암괴벽의 장엄함에 넋을 잃을 일 없으니
한 곳에만 정신 팔 필요 없고
묵묵히 지나쳐도
눈길 청하지 않는 소박하고 낮음에 익숙한 것들.

스쳐지나가도 시원함을 남기는 바람처럼
서로가 그렇게
제자리에 서있을 뿐입니다.
특별한 눈길 없어도
단아한 제철 꽃 피우다
말없이 스러져가는
낮고 작은 것이 어울리는 작은 산입니다.
그래서 참 편안합니다.


2007년 11월11일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원장  장 혜경 요세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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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수도원 100주년 준비- 기억할 분들

왜관 수도원은 2009년에 백주년을 맞이한다(1909-2009).
 
1909년 독일 뮌헨 인근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Sankt Ottilien)의 수도자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시작된 것이 마치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한국 전쟁의 와중에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하느님의 섭리는 수도자 공동체와 늘 함께 하셨다.

북한 땅에서 피를 흘리신 수도원 장상과 수도자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은인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수도원 재건을 위해 일했던 많은 수도자들과 은인들...

달력의 첫 장에 적힌 것 처럼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노고와 열정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며" 라는 문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1.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를 파견한 분

2.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 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자

3.        백화동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설립자

4.        김영근 베다 신부 - 피난공동체 장상

5.        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설립자

6.        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신부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7.        백오리 비뚜스 수사 –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수사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분

8.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 덕원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9.        스위스 캄 올리베따노 수녀회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 연길 수도원 선교활동 동반

10.     오병주 요셉 선생 – 덕원,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 협력자

11.     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 은인(피난공동체를 도우신 분)

12.     임정업 마리아 여사 – 은인(왜관 수도원 성당 봉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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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


1870
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95년 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고 한 달 뒤에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897년 첫 서원을 했다. 1902년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국에 진출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순방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선교사 파견을 제의 받았고, 어려운 수도원 사정에도 불구하고, 1908년 선교사를 파견하여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방문 중에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해 독일로 가져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금강산이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한국문화를 유럽에 알렸다. 1931년 총아빠스직을 사임하고 동아프리카 페라미호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564 3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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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887
년 독일 풀다 교구 오베루프 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0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0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08년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된 후 서울 백동 수도원을 세웠다. 1913년 아빠스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신설된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 되었다.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본당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의료봉사 등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덕원 수도원을 선교활동과 수도생활이 완벽히 조화된 이상적인 모델로 만들었다.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어 1950년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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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동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1889년 독일 아욱스부륵 교구 오토보이렌에서 태어났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11년 첫 서원하고 191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22년 연길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연길 분원장까지 맡으면서 간도지역 선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28년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연길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1937년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교육, 출판, 자선사업을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1950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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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베다 신부

191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고 1943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9년 덕원 수도수도 폐쇄될 때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로부터 장상권을 위임 받은 노 안셀모 신부가 당시 차부제였던 김 베다 신부를 한국인 수사들에 대한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교회와 연합회에 덕원 수도원 상황을 알렸고,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새로 꾸려진 피난 공동체의 생계와 영성을 책임지며 1952년 장상으로 임명된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실질적인 장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사목과 피정집 책임, 분원장, 수녀원 지도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김 베다 신부는 강론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02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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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도 디모테오 몬시뇰


1905
년 스위스 바셀 교구 로어에서 태어났다. 1927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군데 본당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수를 맡기도 하였다. 1947년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불안한 한국 내 정치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하여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로부터 한국 공동체를 책임자로 임명되어,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에 마련한 새 정착지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기틀을 잡았다. 같은 해 함흥 및 덕원 교구장 서리로 임명 받았고, 1953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1954년에는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몬시뇰 칭호를 부여 받았다. 1964년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원장직을 사임하였고 199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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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수 에른스트 신부


1907
년 독일 쾰른 교구 니더카셀에서 출생하였다.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고 1929년에 첫 서원을 하고 1934년 사제서품을 받고 같은 해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말을 배우는 동안에는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후에 여러 군데 본당에 나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1949년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가 1956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왜관 감목대리구 소속 여러 본당에서 선교하였으며, 수녀원 지도 신부로 있었다. 또한 73세의 나이로 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탕하고 곧은 성격이었으나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언제나 어깨춤을 들썩여 좌중을 흥겹게 했다. 2000년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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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리 비뚜스 수사


1908
년 독일 뷔르쯔부륵 교구 미헬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7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39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 되었다. 수도원에서 오리 키우는 일을 해서 오리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제본 장인으로 인쇄소에서 일했다. 1949년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다른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되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1959년에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오랫동안 인쇄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외원 사무를 보다가 은퇴하였다. 한결 같은 노동과 기도의 삶으로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 젊은 형제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천수를 누리다 2003년에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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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수녀원


1925
년 당시 원산 대목구장이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초청으로 독일 툿찡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원산으로 파견되었다. 툿찡 수녀원은 오틸리엔 수도원과 더불어 1885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선교 베네딕도회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남녀 두 수도공동체를 창설하였는데 두 공동체가 협력하여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1927년 원산 분원이 자립수녀원으로 승격되었고 수녀들은 덕원 수도원이 펼치고 있던 선교 활동인 본당사목, 교육사업에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도 병원, 시약소, 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회와 지역 주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되자 남한으로 피난해온 수녀들이 다시 공동체를 일구어 오늘날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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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스위스 죽
(Zug)주에 위치한 캄 수녀원은 연길 지목구장 백 테오도로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31 9 14 6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다. 1945년까지 모두 7개의 본당에 지원을 설립하면서 연길 수도원의 간도 지방 선교사업을 동반하였다. 1946년 수녀원을 폐쇄되고, 1951년 모든 서양 수녀들이 중국을 떠났다. 한국인 수녀들은 1947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와 경기도 소사에서 공동체를 꾸렸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 부산에서 수련소를 다시 열었고, 1955년에 연길 수녀원이 폐쇄된 후 첫 종신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동체가 성장해 오늘날 한국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회가 되었는데 부산 광안리에 본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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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요셉 선생


1890
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숭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울 백동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원산 해성 학교를 비롯하여 덕원, 고원, 신고산 등 각지에 본당 11개소, 학교 10개소를 설립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1940년부터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비서직로 일했고, 독일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부터 탄압을 받았고, 6.25 전쟁 당시 원산이 회복되었을 때 UN군의 도움으로 원산 가톨릭대학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성주에 정착했고 17년간 성주 본당 회장으로 있으면서 왜관 수도원 선교활동에 협력하였다. 1969년 교회와 수도원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12 25에 선종하여 평신도로서는 유일하게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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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맥카아티 신부


6.25
전쟁이 발발하고, 헤어져 있던 덕원 수도원 수사들이 부산 중앙성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8명의 수사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여기에는 연길과 함흥 교구 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맥카아티 신부는 아메리카 카시노 연합회 소속으로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의 군종신부로 복무 중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어렵게 피난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맥카아티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와 여러 모로 형제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맥카아티 신부의 주선으로 공동체는 1951년에 대구 교구 주교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이 디모테오 신부가 입국 할 때까지 공동체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간 맥카아티 신부는 1963년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2000 2 5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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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업 마리아 여사


1951
년 대구에서 돌아가신 덕원 수도원 출신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서모이다. 홍콩으로 이민 가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면서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재산을 모았는데 평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동호 쁠라치도 아빠스가 연합회 일을 보러 유럽을 왕래하다가 홍콩을 경유하곤 하였는데 그때 여사를 만났고 왜관 수도원에 새로운 성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자신이 애써 모았던 재산을 봉헌하여 성당 신축비용 대부분을 대었다. 1975년 수도원 성당이 완공되면서 성당 출입구 벽면에 기념 표석을 새겨 그분의 장한 뜻을 기렸고, 1976년 수도원 측에서는 교황 강복장을 전달하였다. 198857에 선종하였고 그분의 원의에 따라 수도원 묘지 곁에 안장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백주년 (1909-2009)




[동영상] 울릉도에 50년 만에 많은 눈이 왔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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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 넘게 눈이 내린 '나리 분지'의 제설 작업

<울릉도의 평지인 '나리 분지'에 2m가 넘는 눈이 내려 제설 작업을 하고 있다. 울릉군청>



아버지께서 e-mail로 울릉도에서 보내 주신 사진과 동영상을 보니까, 굉장히 많은 눈이 왔네요.
작년에 눈꽃 축제를 하려다, 눈이 오지 않아서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제1회 울릉도 눈꽃 축제를 성황리에 마쳤다고 합니다.

울릉도가 생길 때 화산이 분출했던 나리 분지에는 2m가 넘는 눈이 내려, 집들이 지붕만 보이네요. 울릉도 최정상인 성인봉(984m) 위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도 눈에 덮혀 조금만 보이네요.

많은 눈 때문에 집이 파손된 분들도 계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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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였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보통 때 보다 더 따뜻하기도 합니다...

구정을 전후해 내린 눈 처럼, 새로운 희망과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길 바래 봅니다.




<울릉 군청 최종술 씨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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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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