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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진'에 해당하는 글(1)
2008.03.27   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 울릉도 중개척기를 노래한 가사 작품(1906)


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 울릉도 중개척기를 노래한 가사 작품(1906)
* 증조부님의 가사 작품 


저의 조부께서 울릉도에 들어 오셔서(1894년), 1906년 지으신 가사 작품인데, 경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서원섭 교수님께서 울릉도에 오셔서 채록하시고, 논문으로 발표하신 내용입니다. 조부님 작품의 음수률을 송강 정철의 것과 비교하면서 그 우수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박순진(朴淳鎭)의 子 박팔수(朴八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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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인터넷 '파란'과 '파스'의 백과사전에서)

1906년 박시옹이 울릉도 개척 때의 생활상과 풍물을 소재로 지은 가사. 1878년의 울릉도 개척령 뒤 울릉도 중개척기에 해당하는 1894년 울릉도에 들어간 지은이가 그곳에서 두 아들을 얻은 뒤 지은 것이다. 장남 순진(淳鎭)의 집에서 발굴 당시 작품의 제명(題名)이 없는 것을 발굴자 서원섭(徐元燮)이 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으로 혼란한 중에 고향을 떠나 울릉도에 입도하는 지은이의 심정과 항해 과정, 개척민들의 어려운 생활과 상부상조, 일본과의 물물교환, 뛰어난 자연풍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간결한 문체와 정연한 형식을 갖춘 비교적 짧은 작품이지만 《정처사술회가(鄭處士述懷歌)》와 함께 울릉도 개척기의 정황을 표현한 희귀한 작품이다. 섬을 소재로 한 작품이 드문 가사문학에서 한국 3대 도서의 하나인 울릉도를 소재로 지은 작품이라는 데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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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도선경가 (鬱島仙境歌)

서원섭, “울도선경가고”, [논문집] 13, 경북대, 1969.

1, 머리말

여기 소개 발표하는 가사는 필자가 1967년 여름에 울릉도 민요(1)를 수집키 위해서 들어 갔을 때 얻은 것이다. 민요 뿐만 아니라 국문학과 관계되는 자료는 다 모아 보겠다는 것이 필자이 욕심이고 보매, 가는 곳마다 이 방면 자료를 수소문하던 차 서면 통구미에서 정처사(鄭處士) 술회가(述懷歌)(2)를 얻은데 힘입어 안내하는 동장
박귀수(朴龜洙) 에게 가사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 없는가고 물었더니 자기 할아버지가 중개척(中開拓) 때에 들어와서 지은 가사가 있는데 , 이를 10여년 전에 자신이 베낀 필사(筆寫)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얻어 보니 간결한 문체에 그 형식이 너무나 잘 다듬어져 있기에 원본을 구하기를 원했더니 씨의 큰집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 형님에게 연락을 해 주겠다고 했다. 십여일 후에 천부동(天府洞) 에 가서
박영수(朴永洙) 씨를 찾아 갔더니 동생에게 연락을 받았다면서 다음날 본천부동(本天府洞) 에 계시는 부친댁에 안내하겠다고 한다.

이튿날 본집에 가니
박순진(朴淳鎭) 옹의 말씀이 원본은 잃어버린지 오래라고 하시면서 내보이는 가사를 읽어 보고서는 약간의 오사(誤寫) 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잘못된 곳을 일일이 바로 잡아 주셨다. 여기 발표하는 가사는 박옹의 교정본(敎正本) 임과, 또 원래 이 가사에는 제명(題名)이 없었기 때문에 필자가 울도 선경가(鬱島仙境歌) 라는 이름을 붙였음을 밝혀둔다.

2, 지 은 이

박시옹은 자(字)를 형오(衡五)라 하고, 현복(玄復)공을 아버지로, 이득상(李得祥)의 딸 여주(麗州) 이씨를 어머니로 하여 고종(高宗) 원년 갑자(甲子)(1864.A.D) 음력 7월 2일 울주군 농소면 창평리 송정촌(松亭村)에서 삼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시옹이 태어난 때는 대원군의 집권으로 쇄국정책이 시작되려는 때로 바야흐로 국가다단(國家多端)한 시기였다. 세 살 때인 병인(丙寅)(고종(高宗)3년 1866A.D)에는 천주교도의 학살로 프랑스 함정의 내공(來攻)과 미국 상선 샤만호 사건이 일어났고, 열두 살 때인 을해(乙亥)(고종12년 1875A.D) 8월에는 일본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에서 포격한 사건이 일어나,  이 때문에 그 다음해 강화도에서 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열다섯살 때인
고종15년 (1878A.D)에는 울릉도의 개척령이 있었다.

열아홉 살 때에
임오군란(壬午軍亂)(1882A.D)이 일어나 정국이 극도로 혼탁해지자 이 난세를 피해 울릉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스물 한 살 되는 갑신(甲申)(고종(高宗)21년 1884 A.D)에는 울산 이씨 자중(自中)의 딸과 결혼하여 세 딸을 낳았고, 고종31년 갑오(甲午)(1894A.D) 씨의 나이 서른 한 살 때 동학난이 일어나는 등 세상이 극히 어수선하자 살기 좋다는 울릉도로 들어가 북면 천부동(天府洞)에 자리를 잡고 농사에 힘썼다.

들어간 지 7년 만인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1901 A.D) 에
맏아들 순진(淳鎭)을 낳았고, 5년 뒤인 병오(丙午)(1906 A.D) 1월 27일에 용진(庸鎭)(일명: 재릉(再陵)을 낳았다. 딸만 셋을 낳다가 이 섬에 들어가 맏아들을 보고 이어 막내 아들을 또 낳자 그 기쁨을 가누지 못해서 칠 안에 이 가사를 지었던 것이다. 옹은 1947년 6월 15일 84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3)

[참고]
(1) 이 때 132편의 민요를 채록하여 그 중 일부를 발표한 바 있다. 졸고 울릉도 민요 연구 <어문학 18>1968.
(2) 원래는 초개척 때의 작품인 이 가사를 발표하고 그 다음에 중개척 때 가사인 울도 선경가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한정된 원고의 장수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분량이라 하는 수 없이 다른 학술지에 발표키로 한다.
(3) 밀양 박씨 대헌공파(大憲公派) 세보(世譜)와 지은이의 두 아드님(순진(淳鎭), 용진(庸鎭)옹)의 구술 자료에 의함.



3. 가사 소개

제 1 단

어와 세상(世上) 사람들아 이내말쌈 들어보소
수백다족(數百多族) 송정촌(松亭村)에
(4) 내맴이(5) 생장(生長)하야
부모(父母)에 은덕(恩德)이며 형제(兄弟)간 우애(友愛)로서
명신가절(明新佳節) 좋을때에 남녀노소(男女老少) 함께모아
희희낙낙(喜喜樂樂) 지내나서 백년(百年)을 기약터니

세생(世上)이
(6) 분분(紛紛)튼가 신맹(身命)이(7) 불행(不幸)튼가
삼십(三十)이 계오넘어 가오(甲午)
(8)을미(乙未) 당하였네
동기지정(同氣之情) 다베리고
(9) 울도(鬱島)로 들어온다

이는 본 가사의 서사(緖詞)로서 고향 송정촌에서 부모 친척들의 사랑속에 기쁜 나날을 보내면서 고향 동산에서 백년을 살아 보겠다고 다짐한 것도 잠깐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해지자 신개척지 울릉도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말하고 있다.

[참고]

(4) 울주군 농소면 창평리 송정촌
(5) 내몸이의 잘못,
(6) 세상의 잘못.
(7) 신명의 잘못.
(8) 갑오의 잘못.
(9) 다버리고의 잘못.


제 2 단

만경창파(萬頃滄波) 동해변(東海邊)에 일엽선(一葉船)을 잡아타고
순풍(順風)에 돛을달어 일주야(一晝夜) 달려오니
만학천봉(萬壑千峰) 솟인 것이 이것이 울도(鬱島)로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실고 순풍에 돛을 달고 하루 낮밤을 향해하며 울릉도에 닿았다고 하는 항해 경로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 3 단

주희(周廻)는 일백리(一百里)나(10) 평지(平地)도 전혀없다
산을지고 집을짓고 난글비고 밭을내니
세상(世上)의 별건곤(別乾坤)이 이밖에 또있는가

마맥두태(마麥豆太)
(11)숨아내세(12) 이것을 보맹하고(13)(保命)
깍새를
(14) 잡아다가 이것을 반찬(飯饌)하니
육지(陸地)의 고양진미(膏梁珍味) 생각한들 어이하리


울릉도는 둘레가 겨우 130리가 되는 조그만한 섬인데다가 평지라고는 성인봉(聖人峰) 아래에 옛 분화구의 화구원(火口原)인 면적 50정보의 작은 분지가 있을 뿐 평지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 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감자 보리 콩 등을 심고, 깍새를 잡아 반찬을 하는 등 개척자의 꾿꾿한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
(10) 울릉도는 둘레가 44,21Km 면 적은 72,44Km2 직경이 약 30리의 작은 섬 이다 .
(11) 감자 보리 콩.
(12) 심어 내세의 잘못.
(13) 보명하고의 잘못.
(14) 개척때 이 섬에는 깍새가 많이 있어 이를 잡아 먹었다고 한다 깍새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깍새등(깍새가 많은 등성이란 뜻)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도 알수 있다.

제 4 단

삼동(三冬)을 당하오면 나날이 풍설(風雪)이라
이웃출입(出入) 전혀막고 벌기같이 들어앉아
감자밥 무시국을 욕기복통 대로하니
우습다 우리인생 각색풍상(各色風霜) 다적는다
(15)

겨울이 되면 몇자 가 되리만큼 큰 눈이 쌓여 이웃 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마치 벌 모양으로 들어 앉아 봄날을 기다리며 가만히 생각하니 울릉도까지 들어오게 된 자신이 우습기까지 하다고 하였다.

[참고]
(15) 다 격는다. 다 경험한다.


제 5 단

그럭저럭 지내나서 봄날이 돌아오면
장설(壯雪)이 다녹은후 춘풍(春風)이 화창하다.
집집이 농사짓기 인생(人生)의 직업(職業)이라
호미들고 밭매기며 산에가 나물뜯기
(16)
상부모(上父母} 하처자(下妻子)도 이로서 보맹(保命)하니
(17)
재미로서 지내노니 건고(勤苦)를 피할소냐


봄이 돌아와 날씨가 따뜻하면 쌓였던 눈도 녹고 집집마다 농사에 힘쓰는 한편 산에 가서 나물을 뜯는 고달픈 삶이 계속되지만 이것이 다 처자를 부양하는 것이고 보면 고달픔도 잊을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
(16) 이섬의 특산물 중의 하나가 이 산나물이다 . 전호(前胡) 꼬치미 고사리 명이 삼나물 부지기초(不知饑草) 고비 곤대서리 미역초 땅두릅 등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수 없을 정도로 그 맛이 좋다.
(17) 보명(保命) 하니의 잘못.

제 6 단

대해중(大海中)에 오는배는 일본(日本)으로 들어온다
포백(布白)이며 각색물건(各色物件) 두태(豆太)로서 바꿔내니
이고데 사는사람 의복(衣服)이 글로난다.


개척 후에도 일본 사람들이 내왕하며 베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실고 와서는 이곳에서 나는 콩과 바꾸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제 7 단

갑신년(甲申年)(18) 개척(開拓)후에 천여(千餘)집 되었으니
해중(海中)에 솟은섬이 아매도
(19) 명지(名地)로다
산천(山川)에 있는풀이 약초(藥草)가 반이넘고
지중(地中)에 솟은섬이 물맷도
(20) 기이(奇異)하다
풍토(風土)가 순(順)하기로 인간(人間)에 병(病)이적고
육지(陸地)가 머자하니 인품(人品)도 후(厚)하더라.

고종 21년 갑신정변 의 어수선함을 피해 들어오기 시작한 가구가 이제는 천여집이 넘어 초개척 때의 어려움이란 찾아볼수 없고 산에 있는 풀은 대부분이 약초요, 풍토 기후 인심이 좋고 병이 없는 그야말로 지상낙원(地上樂園)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
(18) 갑신정변(김옥균 난)이 일어난 해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된 듯 하다.
(19) 아마도의 잘못 .
(20) 물맛도의 잘못


제 8 단
술을하야 서로청코 밥을하야 논아먹고
문학(文學)을 숭상(崇尙)하니 촌촌(村村)이 글소리라
팔도(八道)사람 모여들어 한이우지 되었이니
서로추축(追逐)
(21) 하는것이 이것도 연분(緣分)이라

팔도(八道)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 이웃이 되어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 하는 한편 동리마다 서당을 차려 글 읽는 소리가 자자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곳이 Utopia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
(21) 추축(追逐) : 벗 사이에 서로 왕래하여 교제함.


제 9 단

주야(晝夜)이 도는마음 환고향(還故鄕)이 원(願)이로다
풍진(風塵)도 식어지고 국태민안(國泰民安) 하신후에
남녀간(男女間) 키와내어 고향(故鄕)을 찾어가세

편안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어수선한 육지에 두고 온 부모 형제에 대한 생각은 간절한 것이었다. 언젠가 풍진(風塵)도 식어지고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장성한 아들 딸을 거느리고 고향에 가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있다.



4. 내용
본 가사의 내용을 고찰함에는 그 문맥에 따라 편의상 9단으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 내용 부분은 각 단  아래에 배치하여,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치하였다.)


5. 형식

본 가사의 형식을 보면 모두 43절 86구 635자로 짜여져 있는데 그 음수율은 다음과 같다. 3.4조 ― 53개, 4.4조 ― 33개가사의 기본 음수율이 3.4조와 4.4조라고 한다면 이 가사는 그야말로 완벽한 형식(음수율)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오늘날 전하는 가사 중에 그 음수율이 3.4조와 4.4조 만으로 이루어진 가사는 이 가사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사의 형식(음수율)이 얼마나 잘 짜여져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가사 문학의 제 일인자인 송강 정철((送江鄭撤) 의 속미인곡(續美人曲)과 견주어 보기로 하겠다.

작 품

절수

구수

자수

2.3조

2.4조

3.2조

3.3조

3.4조

3.6조

4.3조

4.4조

속미인곡

48

96

670

3

12

1

14

33

1

2

30

울도선경가

43

86

635

53

33


아동지이소(我東之離騷)니. 영중지백설(漏中之白雪)이니. 겁가여공명출사표(可與孔明出師表) 백중간야(伯仲看也)겂니 하며 역대 비평가들로부터 절찬(絶讚)을 받은 바 있는
송강의 속미인곡이 2.3조, 2.4조, 3.2조, 3.3조, 3.6조, 4.3조, 4.4조, 등 8개의 음수율로 이루어 진데 비해서 본 가사는 다만 3.4조와 4.4조의 2개의 음수율 만으로 짜여졌다는 것은 이 가사의 형식(음수율)이 얼마나 우수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6. 맺는말
개척(開拓)된 지 90년도 안되었을 뿐더러 개척이래 지금까지 논밭의 부족으로 바다에만 의존해야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라 이 섬에 노래와 가사를 지어 부를 여유가 없는 탓인지 이러한 류의 작품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초개척기의 가사 정처사술회가(鄭處士述懷歌)와 중개척기의 본 가사를 얻을수 있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이 가사를 살펴 본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가사는 민요와는 달리 섬을 소재로 한 가사들이 별로 없는 중에 우리나라 삼대 도서의 하나인 울릉도를 소재로 해서 지었다는 점에서 크게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이 가사는 광무(光武) 10년(1906.A.D.) 2월 2일 경에 지어진 것이다.

셋째, 본 가사를 9단으로 나누어 살펴본 바 퍽 간결한 문체로 쓰여졌을 뿐 아니라 중개척기의 사정을 잘 그려 놓고 있다.

넷째, 본 가사를 통해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도 일인(日人) 들이 물건들을 바꾸기 위해서 이 섬에 내왕(來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본 가사의 음수율은 3.4조와 4.4조만으로 되어 있다.

여섯째,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과의 음수율의 대비(對比)에서 속미인곡보다, 더 잘 짜여진 가사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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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감성을 새롭게 해 주었던 깊은 체험들도, 마치 시간이 지난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내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여기 저기 파편화 되어 묵히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 기도의 벗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또한 내 삶의 기록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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