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가곡 '가고파'의 노랫말처럼 쪽빛바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곳. 경남 마산에서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구산면'으로 향하게 된다. 구산면 소재지인 수정리 해안을 만난다. 수정마을은 예로부터 바닷물이 맑고 회 맛이 고소한 물고기가 잘 낚여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자그마하고도 살가운 갯마을이다. 육지 쪽으로 움푹 파고 들어온 수정만 바다는 커다란 호수처럼 잔잔하다. 파도가 거의 없어 그야말로 이름처럼 '수정'(水晶) 같은 바다를 자랑하는 곳이다. 마을 옆 나지막한 산 중턱에는 관상수도회인 '엄률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회'(원장 장혜경 수녀)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야말로 관상수녀들이 봉쇄를 지키며 은둔과 절대 침묵 속에서 세상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조용한 어촌마을이다.

▲ 마산시와 STX중공업이 대규모 조선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구산면 수정만 매립지 전경.
380여가구가 거주하는 수정리 마을이 바로 옆 왼쪽에 있고, 앞 쪽에는 맑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 # 조선소 들어오면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이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던 시골마을이 요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마을 앞 매립지에 조선소를 적극 유치하려는 마산시와 환경오염 및 생태계 파괴, 생활터전 상실을 우려하며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08년 2월 3일자 제956호 참조> 기자가 현장을 찾은 날도 조선기자재 공장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대책위와 트라피스트회 수녀들은 경남도청과 마산시청 앞에서 조선소 유치 결사반대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평생 수도원 밖으로 나오지 않고 관상생활을 하는 수녀들이 묵주 대신 마이크를 들고 마을 주민,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도청과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수정마을 1000여 명 주민과 트라피스트회 수녀들은 지난해 9월부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철제 가림막으로 가려진 매립지 안에서 엄청난 굉음과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 분진이 밤낮으로 계속됐다. 주민들은 23만㎡ 매립지 안에 쌓여 있는 대형 크레인, 조선기자재들과 선박 블록을 용접하는 불빛을 목격했다. STX중공업이 '부품 물류창고를 짓는다'고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아직 매립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기자재 생산 시설을 시공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와 회사 측이 환경영향평가나 공청회 한 번 없이 몰래 환경과 인체에 치명적 위험을 줄 수 있는 대규모 조선소를 건립하려는 은밀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수정마을 주민들은 격분했다. 주민대책위 등은 "매립지 반경 500m 안에 384가구가 거주하는 이곳에 조선소가 들어서면 마을은 엄청난 '오염폭탄'을 맞을 것이 뻔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트라피스트회 장혜경(요세파) 원장 수녀는 "시와 회사 측은 인간 생명과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선소 건립을 철회하고 합리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트라피스트 수녀회 장혜경 원장 수녀(왼쪽)와 강성숙 수녀, 통영ㆍ거제환경운동연합 장기동(오른쪽)씨가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쇳가루와 유독성 페인트 분진, 소음 등으로 인해 심각한 오염피해를 입고 있는 진해시 죽곡동을 찾아 피해실태를 살펴보고 있다.
| # 주변지역 환경오염 피해 심각 조선소 선박 제조업은 그 특성상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선박에 대형 분무기로 도장(페인트 칠)을 하는 과정에서 유독성 페인트 분진이 대량으로 배출된다. 또 용접이나 녹을 제거하는 연마 과정에서 발생하는 쇳가루와 미세먼지는 물론 중금속 폐수로 인한 해양오염도 심각하다. 장혜경 원장 수녀, 통영ㆍ거제환경운동연합 장기동(바오로)씨와 함께 수정리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진해시 죽곡동을 찾았다. 마을 앞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STX조선(옛 대동조선)에서는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며 선박건조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캐한 페인트 냄새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슴 속까지 왠지 모를 답답함과 통증이 느껴졌다. 공터에 주차돼 있는 차량 표면은 쇳가루와 페인트 분진이 달라붙어 상당히 거칠게 훼손돼 있었다. 조선소와 10년 넘게 동거해온 죽곡동 90여 가구 250여 명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죽곡동 주민대책위 이모씨는 "식탁까지 쇳가루, 페인트 분진이 날아오고, 밤낮 없이 쿵쾅거리는 엄청난 소음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라며 "분진과 소음 때문에 주민들이 불면증과 신경쇠약 증세를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조선소가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대규모 산업단지가 아닌 주거지 바로 옆에 조선소를 세운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2월 27일부터 주민들과 단식농성에 들어간 장혜경 수녀는 "수정마을 주민들은 STX조선 본사가 있는 진해 죽곡동처럼 망가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며 "수정만 매립지에 조선소를 건립하려는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진해 죽곡동 뿐 아니라 경남 통영시 봉평동ㆍ도남동, 거제도 등 대형 조선소가 들어선 어촌마을은 모두 죽음의 마을로 변했다.
글=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사진=백영민 기자hee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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